오피니언 조명탄

백설공주와 정치적 올바름

입력 2025. 04. 18   16:53
업데이트 2025. 04. 2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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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민 서울신문 문화체육부장
홍지민 서울신문 문화체육부장

 


요즘 부모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에게 추천할 책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어린이·청소년을 겨냥한 책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부모님 세대는 조금은 편하지 않았을까 싶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집이 대유행이었다. 소년·소녀 세계 명작동화 전집, 한국사 이야기 전집, 한국 전래동화 전집에 위인전 전집 정도면 당시 볼 만한 책은 섭렵했다고 보면 되겠다. 큰 고민 없이 대동소이한 전집류를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하긴 애써 골라 준 책에는 관심이 없고 저 좋아하는 ‘흔한 남매’ 시리즈만 고집하는 둘째를 보면, 이 모든 고민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어렸을 때 접했던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디즈니 고전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림책이다. 당시로선 컬러 삽화가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밤비’ ‘피노키오’ ‘덤보’ ‘피터 팬’ ‘신데렐라’ ‘모글리’ ‘푸’ 등은 총천연색을 뽐냈다. 어린 눈에도 그림들이 무척 세련돼 보였다. 지금도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피노키오 등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전형적 이미지가 있다. 그게 모두 어린 시절 읽은 디즈니 그림책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백설공주는 이름처럼 새하얀 피부에 검은색 단발머리, 빨간 입술이 도드라진 모습이다. 당시에는 독일 민담을 모은 그림 형제의 책 속에서 백설공주가 그렇게 묘사됐다는 사실은 몰랐다. 요즘 새로운 작품에 등장하는 신데렐라의 머리 색깔은 밝은 황금색인 경우가 많은데, 기억 속에선 주황색에 가까운 블론드로 남아 있다. 역시 디즈니 그림책의 영향이다.

얼마 전 디즈니에서 백설공주를 실사로 옮긴 영화가 극장 개봉을 한다고 해 관심이 갔다. 원래 알던 백설공주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옷차림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백설공주를 연기한 배우가 구릿빛 피부의 라틴계여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와 함께 보기 위해 예매하려 했는데, 상영 극장을 찾기가 힘들었다. 흥행이 저조해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췄던 것. 제작비 2억5000만 달러(약 3678억 원)가 투입된 대작이었으나 국내에선 관객 18만9000명 동원이라는 참담한 성적을 남겼다. 미국 현지 흥행도 썩 좋지 않았는데, 과도한 ‘PC주의’ 탓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번역되는 ‘PC(Political Correctness)’는 인종·성별·종교·장애 등에 관한 편견이나 차별에 저항하거나 이를 바로잡으려는 신념 또는 사회운동을 말한다. 미국에서 본격화한 PC주의는 정치·사회·경제 전반은 물론 대중문화 산업에도 영향을 주며 콘텐츠에 다양성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물론 마케팅 측면도 고려됐을 터. 가족, 사랑, 우정, 권선징악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담은 작품으로 전 세계에서 사랑받아 온 디즈니가 백설공주 역할을 백인 배우가 아닌 라틴계 배우에게 맡긴 것도 이러한 흐름의 하나로 여겨진다.

옛 작품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다양성을 포용해 재해석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인데, 원작을 과도하게 훼손하는 게 아니냐는 반발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원작이 가진 본질적 매력을 변질시켰다며 거부감을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PC주의가 틀렸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원작을 부정했다고 느껴질 정도라면 그 자체로 포용성을 잃은 것은 아닐까. 문화에서만큼은 더 섬세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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