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김준희의 클래식 읽기

충동과 욕망 그리고 방황...북유럽 대서사를 노래하다

입력 2025. 04. 17   15:24
업데이트 2025. 04. 1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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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희의 마이클(마음으로 이어주는 클래식) 
그리그의 페르 귄트 모음곡

노르웨이 대문호와 국민 음악가의 만남… 
북구 특유의 서정적 음악세계 구축한 북유럽 대표 낭만주의 작곡가 
헨리크 입센 희곡 ‘페르 귄트’ 위한 23곡 중 8곡 선별·재구성한 모음곡
조용한 자연의 생동감 그린 ‘아침 기분’ 헌신과 사랑 그린 ‘솔베이그의 노래’
시대·언어 초월 원작보다 사랑받아

 



노르웨이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1843~1907)는 북유럽 낭만주의 대표 작곡자입니다. 그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수학하며 독일 낭만주의 양식을 익혔고, 이후 노르웨이 민속음악과 자연 풍경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합니다. 북구 특유의 차갑지만 서정적인 정서를 음악에 잘 녹여냈던 그리그의 음악은 청중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은 바로 ‘페르 귄트 모음곡(Peer Gynt Suites)’입니다. 이 곡은 관현악곡이지만 희곡과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탄생한 독특한 형태의 작품입니다. 그리그는 대문호 헨리크 입센 요청에 따라 그의 상징적인 희곡 ‘페르 귄트’를 위한 극부수음악(연극 상연 시 옆에서 연주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총 23곡에 이르는 이 작품은 전주곡, 합창, 춤곡, 행진곡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돼 있습니다. 이후 그리그는 이 중 8곡을 선별해 ‘페르 귄트 모음곡’ 제1권 작품46과 제2권 작품55로 재구성해 발표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모음곡이 원작 희곡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인물, 페르 귄트가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 오제와 함께 평범한 삶을 살지만 충동과 욕망에 이끌려 마을의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납치해 도망치는 것으로 그의 방황이 시작됩니다. 산속에서 마왕을 만나고, 그곳에서도 도망친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그를 기다리던 순수한 연인 솔베이그의 곁에 머무르지만 끝내 그녀를 또 한번 떠납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후, 그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끝없는 방랑에 나서고, 먼 세월이 흐른 뒤 백발이 된 채 고향으로 돌아와 오직 한 사람, 솔베이그의 품에 안겨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그 순간 그는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그대의 변함없는 사랑이 결국 나를 구원했소.”

‘페르 귄트 모음곡’ 제1번 작품46의 첫 곡은 너무나도 유명한 ‘아침 기분’입니다. 페르 귄트가 이른 아침 눈을 뜨는 첫 장면은 새벽 햇살이 천천히 수평선 너머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의 플루트 선율로 시작합니다. 곧이어 오보에와 클라리넷, 그리고 바순으로 이어지는 목관악기들의 대화는 조용한 자연의 생동감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북유럽의 아침 풍경, 특히 노르웨이의 청명한 하늘과 안개 낀 산악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맑고 순수한 음색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이 곡은 따뜻하면서도 쓸쓸한 감정이 동시에 담겨 있고, 고요한 아침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줍니다.

두 번째 곡 ‘오제의 죽음’은 페르 귄트의 어머니 오제의 죽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단조의 느리고 비통한 선율은 어머니를 향한 페르 귄트의 복잡한 감정을 나타냅니다. 조용하고 느린 템포의 선율로 시작되며, 점점 더 무거운 감정을 그리는 듯 현악기의 낮고 긴 음들이 반복됩니다. 방탕한 아들의 삶을 염려하며 생의 끝자락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절제된 모습으로, 마치 말 없는 탄식처럼 표현됩니다.

극중에서 페르 귄트는 어머니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며 죄책감과 슬픔에 휩싸입니다. 그리그는 이를 매우 정적으로 음악에 담았고,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과 아들의 후회는 천천히 교차됩니다. 오제의 죽음은 페르 귄트의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자 인간적인 고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곡은 지금까지도 클래식 음악 중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장송곡으로 손꼽히며 연주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민속 선율과 장송곡의 요소가 일부 사용된 이 곡은 실존에 대한 성찰을 떠올리게 합니다.

세 번째 곡은 ‘아니트라의 춤’입니다. 이 곡은 페르 귄트가 아라비아 사막에서 만난 미녀 아니트라의 유혹을 받는 장면에서 등장하는데, 경쾌하고 유희적인 리듬이 특징적입니다. 8분의 6박자의 가벼운 리듬과 장식적인 선율은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유럽인이 상상한 동양적 정서가 음악적으로 잘 드러납니다. 구조적으로 치밀하게 짜여진 이 춤곡은 각 악기의 배치가 상당히 조화롭고, 그리그의 뛰어난 관현악적 감각을 잘 보여줍니다.

모음곡 제1번의 마지막 곡은 ‘산왕의 궁전에서’입니다. 이 곡은 희곡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즉 페르 귄트가 산 속 트롤들의 왕국에 들어가는 장면을 나타냅니다. 점점 음량과 템포가 고조되면서 긴장감을 극대화하는데, 이 곡은 극적인 요소와 음악적 효과가 완벽하게 결합된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반복되는 주제는 점차 강박적으로 변하며 몰입도를 높입니다. 끝으로 폭발하는 듯한 클라이맥스는 청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두 번째 모음곡은 제1번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예술적 완성도는 오히려 높습니다. 시작은 ‘브리트의 노래’입니다. 납치된 신부 브리트의 절망과 슬픔을 불협화음을 통해 깊이 있게 표현합니다. 이어지는 ‘아라비아의 춤’은 동양적인 음계와 불규칙한 리듬을 통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세 번째 곡 ‘페르 귄트의 귀향’은 바다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오는 페르 귄트의 험난한 여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폭풍우 속 격렬한 음악적 전개가 인상적인데, 역동성과 긴장감 넘치는 리듬이 어우러져 극적인 회귀의 순간을 거침없이 나타냅니다.

마지막 곡은 ‘솔베이그의 노래’입니다. 이 곡은 페르 귄트를 변함없이 기다리는 연인 솔베이그의 헌신과 사랑을 그린 노래입니다. 간결하면서도 깊은 감정을 자아내는 선율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맑은 현악기 반주 위로 흐르는 선율은 마치 노르웨이 산속의 바람처럼 부드럽고 쓸쓸하게 들려옵니다. 인내와 기다림으로 진정한 헌신과 용서, 그리고 구원을 상징하는 뜨거운 사랑을 담은 곡입니다. 모든 음악 여정의 끝에서 솔베이그는 말없이 노래하고, 페르 귄트는 마침내 귀향합니다. 이 곡은 종종 가사를 붙여 연주됩니다. “아마 겨울과 봄이 지나가겠죠, 하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거예요, 난 알고 있어요.”

감성 싱어송라이터 김광진은 그의 3집 앨범 ‘솔베이지’에서 현대적인 언어로 솔베이그의 마음을 되살려 아름다운 가사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북유럽의 차가운 바람을 담은 이 감성은 시대도, 언어도 넘어 서로를 닮은 기다림의 노래로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립니다.


필자 김준희는 연주와 강연으로 ‘대중의 클래식화’를 꿈꾸는 피아니스트다. 저서로 『클래식 음악 수업』 『클래식, 경계를 넘어』가 있으며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필자 김준희는 연주와 강연으로 ‘대중의 클래식화’를 꿈꾸는 피아니스트다. 저서로 『클래식 음악 수업』 『클래식, 경계를 넘어』가 있으며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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