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 트라야누스 황제 승전 기념 원주(圓柱)
다뉴브강 유역 정복사업의 걸림돌
다키아 꺾은 기쁨에 기념비 세워
나선형으로 155개 전투장면 부조
세부 묘사 뛰어나 중요한 사료 역할
워싱턴DC 170m 오벨리스크 등
서양 문명권 원기둥 기념물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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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제국의 라인강과 다뉴브강 유역 정복 사업은 로마의 영토 확장과 방어전략에서 핵심을 차지했다. 이 지역은 로마제국 북부와 동부 경계선이었다. 당시 ‘야만인’으로 여겨진 이민족 부족과 수시로 접촉하고 있던 일종의 변경지대였다. 두 강 유역 지대에 대한 정복 과정은 로마제국 전쟁사에서 확연히 대비된다. 라인강 유역을 연한 제국 북부로의 진출은 이미 기원전 1세기 중엽부터 점진적으로 추진되다가 기원후 9년, 강 건너 토이토부르크숲에서 게르만족 연합군과 벌인 전투에서 로마 3개 군단 병력이 괴멸되면서 무산됐다.
이에 비해 로마제국의 동부 경계를 이룬 다뉴브강 너머로의 확장은 기원후 1세기경에나 본격적으로 실행됐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세기 초반경 트라야누스 황제(Traianus·13대 황제로 98~117년 재위)가 단행한 두 차례의 군사원정과 그로 인한 다키아(Dacia·현재 루마니아 지방) 정복이었다. 그리고 이를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증거물이 포로 로마노 인근에 우뚝 서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 승전 기념 원주(圓柱·Trajan’s Column)다. 이는 고대 로마의 대표적 기념비 중 하나로 손꼽히며, 오늘날에도 로마 도심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마주하고 있다.
사실상 동양 문명권에서는 드물지만 유럽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높은 석재 원주 기념물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 중앙 원주 위에 버티고 서 있는 넬슨 동상이나 파리의 방돔 광장 한복판에 우뚝 솟은 기념탑 꼭대기의 나폴레옹 동상 등을 꼽을 수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DC 시가를 압도하는 높이 170m의 오벨리스크도 이런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러한 원주형 기념비의 원조이자 백미는 트라야누스 황제 원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고대 로마에서 원주는 기념탑, 신전, 공공건물 등 상징적인 건축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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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원주는 어떻게 해서 탄생한 것일까? 이는 원주의 주인공이자 로마제국 5현제(賢帝) 가운데 한 명인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적과 관련이 있다. 로마 속주인 히스파니아의 로마 정착민 출신으로 황제가 되기 전까지 로마군단 장군으로 명성을 떨친 트라야누스는 약 20년간 재위하며 로마제국 영토를 최대한도로 넓혔다. 특히 끈질기게 저항하던 다키아의 정복(101~106년)과 병합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업적 중 하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거대한 기둥을 세우기로 작정하고 3년간(110~113년)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트라야누스 원주 건립을 주도한 인물은 당대 최고 건축가인 아폴로도로스였다. 그는 원주의 설계·건축 이외에 트라야누스 황제 재위 동안 트라야누스 시장 및 포럼과 같은 대형 건축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수행했다. 로마의 속주 시리아 다마스쿠스 출신이지만, 탁월한 실력으로 제국 심장부 로마에서 명성을 얻어 황제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는 원주 건립 책임자로 지명될 수 있었다.
높이가 약 40m에 달한 원주에서 압권은 기둥을 나선형으로 돌며 새긴 다키아 전쟁 승리 관련 부조(浮彫)다. 총 155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부조가 기둥을 따라 아래로부터 상단까지 휘감으며 올라간다. 전체적으로 부조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다키아 전쟁의 전투 장면들이다. 전쟁 준비 단계에서 시작해 군대의 이동, 실제 전투, 생포한 포로의 처형, 다키아 왕국의 데케발루스(Decebalus·재위 87~106년) 왕과의 협상 등 전쟁의 전반적 흐름이 묘사돼 있다. 다음으로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승리를 구가하는 장면들이다. 주요 전투에서 로마군의 승리, 다키아 수도 정복, 데케발루스의 항복 장면 등이 담겨 있다. 궁극적으로는 원주의 주인공인 트라야누스 황제의 리더십과 로마군단의 전투력을 만천하에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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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키아 전쟁은 어떠한 전쟁이었기에 승전의 기쁨에 들뜬 트라야누스 황제가 거대한 기념비까지 세웠을까?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설지 모르지만 다키아 전쟁은 로마제국의 영토 팽창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키아는 발칸반도 북쪽에 있는, 현재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다키아족으로 알려진 호전적이며 거친 성향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영역으로 팽창해 오는 로마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87년경 데케발루스가 다키아 왕국의 통치자가 되면서 로마제국 영향력에 맞섰다. 85년 이래 로마군과의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전하며 강력한 지도자로 떠오른 그는 인접한 다른 부족들을 결집한 후 다키아의 독립을 내세우며 로마제국의 영토 팽창 위협에 저항했다. 이는 의욕적으로 제국 영역을 확장해 오던 트라야누스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다. 황제는 철저한 사전 준비 끝에 101년 대군을 이끌고 다키아 왕국을 침공했다. 다키아군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린 산악지형 전투로 맞섰으나 막강한 로마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도 근처까지 밀려난 데케발루스는 결국 항복하고, 다키아는 로마제국의 보호령이 됐다.
그렇다고 다키아인들의 호전성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로마군 주력이 물러가자 전열을 재정비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데케발루스가 로마 주둔군 요새를 공격하면서 재차 로마의 통치에 맞섰다. 분노한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번에는 다키아 왕국을 완전히 로마제국에 복속시킬 심산으로 105년 두 번째 원정군을 일으켰다. 이때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의 수도를 완전히 포위한 채 적군이 산악지형에 구축한 거점들을 하나씩 돌파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로마군은 우수한 공성전 장비를 동원해 다키아의 요새를 무너뜨렸다. 원정 1년 만인 106년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군대를 격멸하고, 수도를 점령했다. 끈질기게 저항하던 데케발루스가 자결하면서 다키아 왕국은 로마제국의 속주로 편입됐다.
트라야누스 원주는 황제 자신의 다키아 정복을 기념하는 상징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권위, 군사적 역량, 공학기술 수준 등을 표상하는 중요한 가시적 징표였다. 특히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건축가들은 트라야누스 원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로마의 기둥 설계를 많이 참고했고, 기념비적 건축에 원주 형태를 적용했다. 역사적 측면에서도 원주에 부조된 전투 장면은 사실에 기초한 세부 묘사가 매우 뛰어났기에 후대에 고대 로마군의 무기와 군복, 전술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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