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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그곳의 기억들] 그날의 함성, 그들의 염원 되살릴 기억의 출구들

입력 2025. 04. 15   17:20
업데이트 2025. 04. 1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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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그곳의 기억들
독립운동 핫플이 궁금해?! ①서울 광화문

서울의 대표 명소인 광화문. 경복궁 남문인 ‘광화문(光化門)’에서 유래한 지명은 이 일대를 통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시대 중심지였던 만큼 광화문 곳곳에선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볼 수 있다. ‘독립운동 핫플(Hot Place)이 궁금해?!’ 첫 번째 순서로 광화문을 탐방해 보자.  글·사진=이원준 기자

빌딩숲 사이에 있는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독립기념관 제공
빌딩숲 사이에 있는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독립기념관 제공

 

칭경기념비 앞에 모인 사람들. 독립기념관 제공
칭경기념비 앞에 모인 사람들. 독립기념관 제공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대한제국·황제 칭호 기념 뜻 담겨

광화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세종대로 사거리 앞에 자리 잡은 칭경기념비(사적 제171호)는 고종 즉위 40주년(1902)을 기념한 비다. 고종이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황제 칭호를 사용했던 것을 기념하는 뜻도 담겨 있다. 특히 비전(비를 보호하는 건물) 남쪽의 무지개 모양을 한 만세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떼어 가 대문으로 쓰던 것을 광복 후 찾아와 복원했다.

 

 

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가 열린 종각역 5번 출구 일대.
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가 열린 종각역 5번 출구 일대.

 

만민공동회 집회 터·‘황성신문’ 터 / 종각역 5번 출구
‘시일야방성대곡’ 민족언론 소임 다해

광화문광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종각역에도 독립운동 정신이 서려 있다. 종각역 5번 출구(영풍문고 방면)에서 만날 수 있는 만민공동회 집회 터와 ‘황성신문’ 터가 대표적이다.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이곳에서 1만 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에 맞서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했다. 이곳엔 국한문 혼용신문 ‘황성신문’도 있었다. 신문 주필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을사늑약을 규탄할 당시 신문을 발행한 장소도 이 위치다. ‘황성신문’은 19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 침략을 규탄하며 민족언론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연합뉴스 빌딩.
연합뉴스 빌딩.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 연합뉴스 빌딩
항일투쟁 보도…신민회 기관지 역할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을 발행인 겸 편집인, 양기탁을 총무로 하여 창간됐다. 1907년부터 국한문판·영문판·순한글판 세 종류의 신문을 발행했는데, 부수가 1만 부에 달했다. 비밀결사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까지 담당하며 의병을 비롯한 항일투쟁 사실을 보도했다. 일제 침략을 비판하고,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논설로 민족언론으로 자리매김했다. 창간 사옥 터에는 현재 연합뉴스 빌딩이 들어서 있다.

 

 

육군무관학교 터 표지석.
육군무관학교 터 표지석.


육군무관학교 터 / 신문로1가
대한제국 사관 양성기관…1909년 폐교

육군무관학교는 대한제국 대표 사관 양성기관이었다. 1896년 1월 설립됐지만 아관파천으로 인해 흐지부지됐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난 뒤 1898년 7월 다시 문을 열었다. 입학요건은 20~30세의 신체 건강하고 총명한 자 중 추천을 받아 뽑았다. 선발된 학생들을 무관학도로 불렀는데, 이들은 군부 장교나 고위직 관료의 자제였다. 학교는 3과로 나눠 1·2과는 속성과로, 3과는 졸업과로 교육받게 했다. 1900년 졸업생 128명을 처음 배출했다. 1904년 일제에 의해 축소 운영되다가 1909년 9월 폐교됐다. 현재 위치인 신문로1가에는 주상복합건물이 세워졌다.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화·개혁 추구…민족 주체성 일깨워

독립협회는 1896년 서재필의 발의로 광화문 육조거리 동편에서 창립총회를 했다. 1898년 12월 해산당할 때까지 민중과 함께하는 개화·개혁을 추구하며 자주·민권·자강운동을 했다. 열강의 이권 침탈과 내정간섭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민족공동체의 주체성을 일깨웠다. 자주독립의 상징물인 독립문 건립, 개국기원절 경축행사, 태극기 게양, 애국가 보급 등을 하면서 대중의 애국심과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했다. 현재는 대한민국의 탄생과 발전상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관 자리.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관 자리.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관 터 / 신문로1가
전국 규모 여성 의식 계몽 운동단체

일제강점기 대표적 여성단체 가운데 하나인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는 1923년 8월 창립했다. 1927년 무렵에는 30여 개 지부를 거느린 전국 규모의 기독교 여성운동단체로 성장했다. 초기엔 강연회와 성경 공부 등을 통한 여성 의식 계몽에 주력하다가 점차 토산 장려, 금주·금연, 조혼 폐지 등 사회운동으로 활동을 확대했다. 그러나 1938년 일제의 압력으로 일본YWCA에 흡수됐다.


수송공원에 있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 동상(왼쪽)과 보성사 터 기념비.
수송공원에 있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 동상(왼쪽)과 보성사 터 기념비.


보성사 터 / 조계사·수송공원
3·1 독립선언서 2만1000장 인쇄

보성사는 천도교 계통 인쇄소다. 3·1운동을 앞두고 약 2만1000장의 독립선언서가 이곳에서 인쇄됐다. 당시 보성사 사장이던 이종일은 1919년 2월 27일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자택으로 운반했고, 다음 날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3월 1일 당일엔 독립선언에 호응해 궐기할 것을 촉구한 ‘조선독립신문’ 제1호를 이곳에서 찍어 냈다. 보성사 터는 조계사 경내에 있으며, 조계사 뒤 수송공원에선 이종일 동상과 기념비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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