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한국인을 일본인 대우하지 말라” 미 국무장관에 요구

입력 2025. 04. 15   15:20
업데이트 2025. 04. 1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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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 대한인국민회와 안창호 

모든 해외 거주 한국인 의무 가입시켜
기관지 ‘신한민보’ 발행…의무금 징수
캘리포니아선 ‘사단법인’ 허가도 획득
멕시코 농장 교민 해고 사태에 급방문
한인들 문제 파악…신용 중요성 설파
농장주 설득 채용 재개·노동규약 제정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관허장(1914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공식 단체로 인정받아 한인사회 자치와 공익에 일조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관허장(1914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공식 단체로 인정받아 한인사회 자치와 공익에 일조했다.



미국 정부로부터 자치기관으로 공인


1913년 6월 미국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는 한국인 노동자 11명이 헤멧지역의 영국인 농장에 일하러 갔다가 배척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일본 영사가 찾아와 배상금을 받아주겠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대한인국민회에 이 사건을 보고했다.

이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회장 이대위)는 미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먼저 헤멧에서 일어난 사건 개요를 설명하고 “귀국 법률 아래 사는 한국인은 대개 한·일 합병 전에 한국을 떠났고, 한·일 합병을 반대하며 일본 정부의 간섭을 거부한다. 따라서 전시나 평화 시를 막론하고 재미 한인을 일본인으로 대우하지 말며, 언제든 한인에 관한 문제는 한인사회에 교섭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브라이언 국무장관은 1913년 7월 2일 대한인국민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앞으로 재미 한국인에 관계된 일은 일본 정부나 일본 관리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한국인사회와 교섭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대한인국민회가 재미 한국인의 자치기관으로 공인됨에 따라 미국에서 한국인의 활동이 한결 편리해졌다.

도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재미 동포들에게 일상에서 더욱 청결하고, 예의와 약속을 철저히 지켜 한국인의 신용과 명예를 지킬 것을 당부했다. 또한 ‘신한민보’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기관지로 확대 개편해 홍보 활동을 강화했다. 그리고 도산은 모든 해외 한국인이 의무적으로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하도록 하고, 자치기관으로서 의무금을 징수했다. 의무금은 처음에 3달러에서 5달러로, 1923년부터는 15달러로 인상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14년 4월 6일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사단법인’의 허가를 얻어 법률상 권리도 확보했다.

 

1915년 촬영된 도산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임원들.
1915년 촬영된 도산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임원들.



시베리아·만주 지방총회의 시련과 하와이 지방총회의 분열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도산이 직접 지도하는 미국 본토에서는 대한인국민회 회원증만으로 한국인들이 신변 보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1914년 7월 만주 지방총회가 해체됐고, 1915년 5월에는 러시아의 전시 계엄령으로 16개의 지방회와 1150명의 회원을 보유한 시베리아 지방총회가 폐지됐다.

이런 가운데 하와이 지방총회는 1912년 12월 네브래스카대학 정치학과를 나온 박용만을 초빙해 기관지 ‘신한국보(新韓國報)’ 발행 책임을 맡겼다. 박용만의 리더십으로 하와이주 정부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고 하와이 지방총회 안에 경찰부를 둬 자치행정을 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하와이 한인사회가 두 파로 갈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1913년 박용만의 도움으로 하와이에 왔던 이승만이 개인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박용만과 사이가 벌어지자 ‘태평양잡지’를 발행해 국민회를 공격한 것.

1915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재선임된 도산은 8월 25일 두 사람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하와이로 갔다. 도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각각 인근 섬으로 도피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도산은 교민들을 상대로 크고 작은 수십 회의 연설회를 열어 교포들을 설득하고 시비를 가리며 단결을 강조했다.

도산의 성심 어린 노력으로 교민들은 오해를 풀고 단합대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분열과 대립을 끝내고 단합하기로 합의했다. 그제야 박용만과 이승만도 섬에서 나와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도산이 12월 15일 하와이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분열돼 이승만은 ‘동지회’라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 4개월에 걸친 도산의 통합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승만의 동지회가 본토로 확산하면서 국민회와의 갈등은 계속 확산했다.

 

클레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 교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도산(뒷줄 왼쪽 둘째).
클레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 교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도산(뒷줄 왼쪽 둘째).

 

193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관.
193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관.



멕시코 순방과 교민 생활지도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도산은 1916년 4월 클레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에 한국인 2세에게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하기강습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1917년 1월에는 임준기·송종익 등과 함께 동포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이 사업은 처음에는 성공해 자본 총액이 5만여 달러에 달했으며 장차 은행까지 설립할 계획이었으나 애석하게도 1920년 흉작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도산은 10월 멕시코 농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모두가 실직을 당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멕시코로 달려갔다. 당시 멕시코의 한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어저귀(애니깽)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저귀는 용설란의 일종으로 선박에서 사용하는 밧줄을 만드는 원료로 쓰인다. 다년생이라 겉의 큰 잎만 따고 어린잎은 다음 해에 따야 지속적인 수확이 가능하다.

노동자들은 잎을 따서 50개를 한 묶음으로 만들어 묶음 수에 따라 임금을 받는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작은 잎까지 따서 속에 넣고 겉에만 큰 잎으로 위장해 묶음을 만들었다. 이런 속임수를 알게 된 농장주는 한국인 노동자를 모두 해고했다.

도산은 속임수로 신용을 잃은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가를 설명하고, 신용이란 노동이나 상업은 물론 무슨 일을 하든 가장 기본이 되는 자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앞으로는 신용을 지키며 살 것을 약속하게 했다. 그리고 도산은 농장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과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새로운 채용 계약을 맺었다.

1918년 2월 대한인국민회 멕시코지방회는 ‘노동규약’을 제정해 규약을 어긴 자에겐 경중에 따라 벌금을 물게 하고 정도가 심한 자는 축출하도록 했다. 그 밖에 도산은 ‘노동주무원 단속법’ ‘잡기 금지법’ 등을 제정하고, 도산이 직접 남녀용 화장실을 지어 시범을 보이며 생활 환경도 개선하도록 지도했다. 10개월에 걸친 도산의 노력으로 한인 노동자의 근로 태도가 바뀌고, 생활도 안정됐다. 그 결과 멕시코 정부로부터 신용을 회복하고, 한국인 노동자의 우수성이 현지 언론에서 크게 보도될 정도로 달라졌다(『도산안창호전집 11』).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필자 박의수 강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재직 시 학생·교무·기획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교육철학학회 회장과 흥사단 중앙수련원 원장 및 교육운동본부 상임대표로 봉사했다.
필자 박의수 강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재직 시 학생·교무·기획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교육철학학회 회장과 흥사단 중앙수련원 원장 및 교육운동본부 상임대표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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