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하트셉수트’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 파라오
강인한 군주 내면의 불안과고독
상상력 자극하다 한 방에 터지는 카타르시스
극에 잘 녹아든 넘버들 듀엣곡 겨눈다 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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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위엄과 권위의 상징. 당당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하며, 백성을 품는 동시에 누르는 존재다. 뮤지컬 ‘하트셉수트’는 왕의 자리를 견뎌야 했던 한 여인의 고독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파라오’라는 이름 아래 매 순간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고달픈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다.
무대는 고대 이집트다. 화려할 것 같지만, 의외로 간결하고 건조하다. 조명이 비추는 벽면에는 고양이의 음각이 새겨져 있다. 이집트에서 고양이는 신성한 존재였다. 하트셉수트가 고양이 음각을 쓰다듬는 장면은 외로움을 털어내려는 인간의 본능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기억이자 상처다.
하트셉수트는 이집트 역사상 손꼽히는 강력한 여성 파라오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강인한 군주가 아닌, 그 안에 감춰진 불안과 외로움, 진짜 얼굴을 비춘다.
파라오 즉위 축제를 기념한 검술대회에 가면을 쓴 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름은 아문.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이집트 신화에서 아문은 ‘숨겨진 자’를 의미한다.
하트셉수트는 아문에게서 미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문은 사실 과거 하트셉수트와 얽힌 기억을 지닌 인물이다. 전쟁통에 조국과 부모를 모두 잃고, 오직 복수만을 붙들고 살아온 인생이다. 한 사람은 왕이 됐고, 한 사람은 그 왕을 죽이기 위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둘은 지금, 같은 무대 위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하트셉수트를 연기한 제이민은 오래 지켜봐 온 배우다. 예명인 제이민은 본명인 오지민에서 가져왔다. 제이민의 어머니는 1980년대를 풍미한 가수 최혜영 씨다. 1983년 ‘그것은 인생’으로 데뷔한 최혜영 씨는 활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한국 가요계에 강렬한 존재감을 남긴 가수였다. 최혜영 씨의 모습을 기억하는 올드팬이라면 제이민에게서 어머니의 느낌을 0.1초 만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어머니 최혜영 씨가 음악이 아닌,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나왔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아쉽게 접은 연기의 꿈을 딸이 이어받은 셈이다.
어머니의 음악적 DNA를 이어받은 제이민은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일찌감치 SM엔터테인먼트에 캐스팅됐다. 그와 함께 연습생 시절을 보낸 사람이 보아였다. 보아가 춤에 특출했다면 제이민은 좀 더 음악에 깊이 탐닉했고, 결국 기타 연주를 하는 솔로 여가수로 전향한다. 제이민은 국내가 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가수로 데뷔했는데, 이는 윤하를 떠올리게 한다. 2016년 ‘헤드윅’을 기점으로 가수보다는 주로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아문 역의 최수현은 처음 봤다. 2022년 ‘블루헬멧: 메이사의 노래’로 데뷔했고,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플뢰르 드리스’를 연기했다. ‘테일러’의 미첼에 이어 이번 ‘하트셉수트’가 네 번째 작품이다. 신인배우라고 할 수 있다. 웃지 않고 있으면 상당히 차가운 인상인데, 과거를 감추고 하트셉수트에게 접근하는 아문의 이미지에 잘 맞았다.
이 작품은 총 23곡의 넘버를 갖고 있다. 남지영이 쓴 넘버들은 스토리에 잘 녹아들어 이질감이 없다. 2인극인 만큼 솔로곡과 듀엣곡으로 구성돼 있다. 하트셉수트가 부르는 ‘가면’, 박진감 넘치는 듀엣곡 ‘겨눈다’가 특히 좋았다.
‘가면’은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주제처럼 들린다. 파라오라는 가면 속에서 떨고, 울고, 외로워하는 하트셉수트. 혼자 있을 때조차 가면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왕의 고독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겨눈다’는 하트셉수트와 아문이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칼과 활로 싸우며 활로를 찾을 때 부르는 긴박한 넘버다. 두 사람이 제각기 품고 있는 어릴 적 비밀의 리프라이즈와 같다.
정필 작가와 박지혜 연출은 관객들에게 가학적일 정도로 정보를 주지 않는다.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한계까지 자극하며 아주 작은 조각의 힌트만 무심하게 던질 뿐.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 한방에 스토리의 주둥이를 묶었던 노끈을 푼다. 그때 쏟아지는 카타르시스라니!
제이민은 강력한 군주로서의 파라오가 아닌, 가면 속 하트셉수트를 잘 표현해 냈다. 최근 그는 26년이나 몸담았던, 제2의 집과 같았던 SM엔터테인먼트를 떠났다. 자유계약선수처럼 홀가분해진 그를 뮤지컬 무대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뮤지컬 ‘하트셉수트’는 오는 6월 1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한다. 태양이 가장 뜨거운 계절이 오기 전, 파라오의 그림자 아래 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이 무대는 찬란했던 시대의 기록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그 얼굴 위에는 우리 모두 한 번쯤 써봤을 ‘가면’이 겹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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