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Artist Studio 19. 안젤름 키퍼_ 스스로 작품이자 예술세계의 구현이 된 스튜디오
비전통적 재료·기법으로 특유의 질감
독일 현대사 반성 첫 번째 미술작가
옛 벽돌·실크공장 활용 작품세계 확장
미술관·아카이브 작품보전 공간 운영
|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예술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과정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혁신의 순간을 다룬 영화를 상영하는 ‘창작의 순간-예술가의 작업실’을 진행하고 있다. 예술가의 창작 공간이 창작의 과정과 결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호기심이 있는 필자를 사로잡은 필름앤비디오 프로그램으로 백남준, 파블로 피카소, 안젤름 키퍼 등 예술가 다큐멘터리 영화 8편이 릴레이 상영 중이다. 이번 화에서는 ‘창작의 순간-예술가의 작업실’ 프로그램 중 필자를 사로잡은 영화 ‘안젤름’을 바탕으로, 영화와 작가 사이를 오가며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안젤름 키퍼의 작품 세계와 그 창작의 근원인 아틀리에를 소개한다.
영화 ‘안젤름’(2023)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이 안젤름 키퍼의 작업실에서 그의 예술적 근원을 탐구한 3차원(3D) 영화로, 문학 철학 신화 등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 존재와 역사의 순환성을 탐구하는 키퍼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는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지를 예술가의 사고방식을 따라 비선형적으로 추적한다. 현재와 유년·장년의 키퍼를 등장시켜 교차 편집한 픽션 같은 다큐멘터리다. 빔 벤더스 감독은 3D 기술을 활용해 특수안경의 렌즈 너머로 물감의 질감과 두께부터 설치 작품의 입체감을 생생하게 전달해 관람자가 마치 그 공간에 잠시 함께 머무른 듯한 몰입과 공간감을 경험하게 한다.
안젤름 키퍼는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등 독일의 역사·문화를 비판적으로 다룬 첫 번째 독일 현대미술 작가다. 키퍼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 태어나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독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법대에 진학했으나 중퇴 후 뒤셀도르프 미대에 진학해 전위 예술가 요셉 보이스 아래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의 작품은 독일의 역사와 죄책감을 탐구한다. 초기 작품은 금기시되는 주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뤘는데, 특히 나치식 경례를 하는 본인을 유럽의 역사적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시리즈 ‘지배’를 통해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네오 파시스트라고 공격받기도 했지만, 과거를 잊어가는 독일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도발적인 작품을 통해 어두운 과거를 들춰 마주하게 함으로써 성찰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키퍼는 198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독일관 작가로 선정되며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전시는 걸프전과 같은 세계적 재앙과 맞물리며 큰 관심을 받았다.
|
독일 현대사에 대한 키퍼의 통렬한 반성과 고민은 석고, 납, 짚, 진흙, 깨진 유리, 철조망과 같은 비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작품은 스케일이 크고 무거우며, 색감은 어둡고, 질감은 거칠고 두터우며, 중압적인 분위기에 내용적으로 여러 겹의 은유로 가득 차 있어 보는 이의 불편하고 복잡한 감정을 건드린다. 파괴와 창조의 순환은 그가 지속해서 풀어내는 주제 중 하나로 작업 과정에서도 이 순환은 반복된다. 말린 짚 더미를 태우고 그것을 캔버스에 붙여 다시 태운 후 흔적을 남기고, 납을 녹여 들이붓고, 두껍게 물감을 바르고 또 떼어내는 등의 행위를 반복해 작가 특유의 질감을 창조해 낸다.
안젤름 키퍼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미국에 스튜디오를 두고 작업해 왔다. 영화에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키퍼가 사용한 다수의 스튜디오가 등장한다. 스튜디오의 공통점은 대규모 작업에 필요한 넓은 공간과 작업 배경이 되는 자연이 가까운 한적한 곳에 있는 기능을 다한 공장 내지는 창고라는 점이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사용한 독일의 호른바흐(Hornbah)의 초기 작업실을 거쳐 1990년대 초반부터 독일 동부에 있는 옛 벽돌공장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공장 규모의 작업실에서 현장에서 발견한 산업용 재료들을 작업에 사용하면서 키퍼는 평면에서 벗어나 조각과 설치 작업을 시도했고, 작품 세계를 확장했다.
키퍼의 작업실로 널리 알려진 곳 중 하나는 프랑스 남부 바르다크(Barjac)의 스튜디오로 1992년부터 2007년까지 그의 창작활동 중심이 된 곳이다. 키퍼는 오래된 실크 공장을 인수해 40헥타르(약 12만 평) 규모의 대지에 60개가 넘는 건물과 90여 개의 작품을 설치했다.
키퍼는 본인의 스튜디오를 종종 실험실에 비유한다. 그는 이곳을 건축가의 도움 없이 조수들과 함께 조성했는데, 유리 건물, 창고, 지하실, 터널, 납골당 등 본인의 작품이 가장 어울리는 공간을 조성해 안젤름 키퍼의 예술세계 그 자체를 구현해 냈다. 키퍼의 작업실에는 실제 크기의 폭격기 조각, 수십m 높이의 파노라마, 탑처럼 높은 석조 조형물이 실존처럼 펼쳐져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실은 히틀러 시대부터 베를린 폐허까지 이어지는, 가장 어두웠던 독일 역사에 대한 도발적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키퍼는 오랜 시간 인간과 삶, 독일 역사, 종교, 그리고 고대 신화 등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이어오다가 바르다크에 정착하면서 자연과 우주의 섭리, 삶과 죽음, 존재의 기원 등에 관심을 기울여 풍성한 작품 세계를 전개했다. 재료 또한 모래, 나뭇가지, 지푸라기, 그리고 말린 꽃과 같은 자연 소재를 사용하는 등 변화를 보였다.
안젤름 키퍼의 작업실은 거대한 규모로 유명하다. 영화에서 작가는 자전거를 타고 작업실의 수백 호의 캔버스와 작품의 재료들, 입체 작품과 사진 및 자료가 보관된 수납공간 사이를 지나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스튜디오는 작품이 창조되는 작업실을 넘어 거대한 예술 작품과 같은 공간이다. 작업을 진행하는 공간이자 도서관과 창고이며 무엇보다 그의 작품이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보이는 쇼룸이자,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며 예술세계의 물리적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작가의 세계관의 총체라 할 수 있겠다.
키퍼의 스튜디오는 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독일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어 폐허와 같은 공간에서 탄생하는 그의 작품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으로, 각 작업실은 그의 작품 세계와 깊이 연관돼 있어 작가의 예술 여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키퍼는 파리 외곽의 백화점 창고를 인수해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키퍼가 작업실을 파리 근교로 옮긴 후 바르다크의 작업실은 수년간의 정비를 거쳐 미술관이자 아카이브, 키퍼의 작품 세계를 지속 가능하게 보전하기 위한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국내에도 작가들의 작업실이 보존·공개되는 곳들이 있다. 동양화가 서세옥의 가옥은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돼 보전되고, 박노수 가옥은 박노수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서보 화백의 아틀리에와 갤러리가 함께 있는 공간인 기지재단은 작가의 작품을 관리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의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또한 물방울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 화백의 평창동 자택이 ‘화가의 집’으로 2026년 개관 예정이다. 이번 봄 작가의 아틀리에를 찾아 예술가의 삶과 예술의 흔적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창작의 순간-예술가의 작업실’의 영화가 궁금하다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는 5월 24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