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패션의 역사

평범하지만 눈에 띈다

입력 2025. 03. 31   16:09
업데이트 2025. 03. 3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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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 - 치노 팬츠 

고온다습한 필리핀 점령한 미 육군
불편한 모직 바지 대신 만들어 입어
면 소재로 가볍고 내구성 좋아 인기
슬림핏·와이드핏 등 디자인 다양해
셔츠·니트 등 어떤 상의와도 어울려

 

필리핀-미국 전쟁 중이던 1902년경 필리핀에서 촬영된 치노 팬츠를 입은 미 24보병대 모습. 출처=미국 의회도서관
필리핀-미국 전쟁 중이던 1902년경 필리핀에서 촬영된 치노 팬츠를 입은 미 24보병대 모습. 출처=미국 의회도서관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면서 사람들은 편안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옷차림을 찾기 시작한다. 매년 이맘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바지가 있다. 바로 ‘치노 팬츠’다.


‘치노(Chino)’, 이 단어의 역사는 스페인과 관련된 장소에서 출발한다. 이 팬츠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 장소는 과거 스페인 제국이 다스리던 섬나라다. 스페인 제국은 그 섬나라를 처음 발견한 1543년경, 당시 왕세자인 ‘펠리페 2세’(훗날 무적함대로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스페인 군주)를 기리기 위해 ‘펠리페의 것들(Felipinas)’이란 이름을 붙인다. 이 섬이 바로 오늘날 ‘필리핀(Philippines)’이다.


필리핀 발견으로부터 22년 뒤인 1565년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식민 지배는 필리핀을 수탈함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필리핀을 세계와 연결하는 작용을 하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이르자 필리핀 출신 자본가와 고학력자들이 대거 필리핀 사회에 유입되면서 대중으로부터 기존 통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스페인 제국은 이를 강력히 탄압했다. 이후 계몽·개혁 운동을 벌이던 활동가들은 스페인 당국에 의해 탄압받자 1896년 8월 30일 필리핀 사람들이 산후안 델 몬테에서 총기를 들고 일어나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필리핀 혁명이다.


필리핀 독립전쟁이 부침을 반복하던 중 1898년 5월 19일, 지구 반대편에서 쿠바 독립전쟁을 계기로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미국이 마닐라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무찌르고 필리핀에 주둔했다. 이때 미군은 모직으로 된 팬츠를 입었는데, 기온이 높고 습기가 많은 환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군인들은 대안으로 가까운 중국에서 구한 면직물을 능직(綾織)해서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팬츠를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


능직은 평직·수자직과 더불어 직물 삼원조직 중 하나다. 씨실이 일정한 간격으로 한 올 이상 건너뛰면서 날실과 교차해 사선 무늬가 생기는 조직을 말한다. 이 조직은 내구성이 강한 평직과 표면이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수자직의 장점을 모두 갖춰 부드러우면서도 구김이 적다.


이후 이 면직물 팬츠는 점령지의 주된 언어인 스페인어로 ‘중국의’를 뜻하는 접사에서 따온 이름인 ‘치노’라고 불리게 된다.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치노 팬츠는 계속 착용했다. 20세기 초 미 육군은 공식 군복으로 채택하며 힌디어로 ‘먼지’를 뜻하는 카키색을 적용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전 세계에 주둔하면서 치노 팬츠는 대중적으로 착용됐다. 전쟁이 끝난 후 군복을 입던 군인들이 민간 생활로 돌아가면서 치노 팬츠는 차츰 일상복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해병대 출신 영화배우 스티브 매퀸이 착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행한 치노 팬츠는 195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즐겨 입었고, 1980년대에는 비즈니스 캐주얼의 주요 아이템이 됐다. 현재 치노 팬츠는 포멀과 캐주얼을 넘나드는 대표적인 패션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치노 팬츠는 슬림핏, 레귤러핏, 와이드핏 등 다양한 핏과 디자인이 있다. 자신의 체형과 스타일을 잘 고려해 착용하면 멋진 룩으로 연출할 수 있다.


슬림핏 치노 팬츠는 다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디자인이다. 허벅지는 약간 여유가 있지만 종아리는 좁게 디자인해 깔끔한 실루엣을 만든다. 이 때문에 몸에 맞는 핏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하고, 셔츠나 니트와 함께 입으면 세련된 느낌을 줄 수 있다.


레귤러핏 치노 팬츠는 클래식한 실루엣을 유지한다. 허벅지와 종아리에 적당한 여유가 있어 활동성이 좋고, 여러 체형에 무난하게 어울린다. 가장 기본적인 치노 팬츠 스타일로, 티셔츠부터 블레이저까지 어떤 상의와도 조화를 이룬다.


와이드핏 치노 팬츠는 허벅지부터 밑단까지 넉넉하게 떨어지는 디자인이다. 편안하면서도 개성 있는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다. 특히 복고풍이나 스트릿 패션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상의를 몸에 맞게 입으면 균형 잡힌 실루엣을 만들 수 있다.


핏(fit) 외에 턴업(turn up·밑단을 접어 올린 디자인) 치노 팬츠는 캐주얼한 느낌을 강조하며, 크롭 치노 팬츠는 발목이 살짝 드러나 경쾌한 인상을 준다. 컬러 역시 클래식한 베이지뿐만 아니라 네이비, 카키, 올리브그린 등으로 다양해 선택의 폭이 넓다.


치노 팬츠에 쓰이는 소재도 중요하다. 치노 팬츠에 가장 많이 쓰는 소재는 면이다. 면 100% 제품은 부드럽고 착용감이 좋지만 구김이 잘 간다. 리넨 혼방 치노 팬츠는 순수 면보다 더 가볍고 통기성이 뛰어나 여름철에 적합하다. 반면 폴리에스터를 섞으면 내구성이 강해지고 관리가 쉬워지며, 신축성을 높이기 위해 스판덱스를 포함한 제품도 있다.


소재에 따라 색상과 질감도 달라진다. 면 100% 치노 팬츠는 자연스럽게 바래면서 멋스러워지고, 리넨 혼방은 고유의 리넨 텍스처가 살아난다. 반면 폴리에스터 혼방은 색이 오래 유지되고 세탁이 쉬운 장점이 있다. 즉, 어떤 소재를 선택하든 계절과 스타일에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치노 팬츠는 여러 아이템과 함께 멋진 스타일링이 가능하다. 우선 어떤 상의와도 잘 어울리는데, 가장 기본적인 조합은 흰색 티셔츠와 함께 입는 것이다. 이 조합은 깔끔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좀 더 격식을 갖추려면 옥스퍼드 셔츠를 매치하면 좋고, 셔츠를 바지 안으로 넣어 입으면 단정한 인상을 줄 수 있다. 비즈니스 캐주얼로 활용하려면 블레이저와 함께 로퍼나 더비 슈즈를 착용하면 적당하다. 가을, 겨울철에는 니트와 함께 스타일링하면 따뜻하면서도 멋스럽다. 이때 벨트 색상을 신발과 맞추면 전체적인 조화를 잘 살릴 수 있다.


치노 팬츠를 오래 입으려면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 세탁할 때는 뒤집어서 찬물로 세탁하는 것이 좋으며, 뜨거운 물은 원단을 손상시킬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세탁 후에는 바로 탈수해서 널어야 구김이 덜 생기고, 다림질할 때는 낮은 온도로 천을 덧대 다려야 직물 손상이 적고, 천에 다리미 자국이 남지 않는다. 보관할 때는 걸어두거나 가볍게 접어 서랍에 넣고, 오랜 기간 보관할 경우 방충제를 함께 두면 좋다. 또한 신축성이 있는 원단의 치노 팬츠는 옷걸이에 걸어 보관하면 형태를 잘 유지할 수 있다.


치노 팬츠는 19세기 미군 주둔지 군복에서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실용적인 패션 아이템이다. 소재와 색상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으며, 관리만 잘하면 아주 오래 입을 수 있다. 이번 봄과 다가올 여름, 치노 팬츠로 편안하면서도 멋진 옷차림을 시도해 보자.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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