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끝>
2023년 공군 레드플래그 알래스카<5>
28일간 빡빡한 훈련·취재일정 피곤
서산기지 도착 순간 모두가 환호성
잊지 못할 추억 쌓을 수 있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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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슨 공군기지가 있는 페어뱅크스는 알래스카 제2의 도시다. 머나먼 타국까지 왔으면 어떤 곳인지 알아보는 것이 그 나라에 대한 예의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열심히 지역 탐방에 나섰다.
기억나는 것은 디날리 국립공원. 북미 최고봉인 디날리산을 중심으로 툰드라와 산맥, 빙하가 어우러진 2만3000㎢의 방대한 면적을 자랑하는 공원이다. 디날리산의 예전 명칭은 매킨리산이었지만, 2015년 8월 원주민들이 부르던 디날리산으로 개칭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취임하면서 서명한 행정명령에 디날리를 매킨리로 개명하는 게 포함됐다. 하지만 주민들이 반대해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다.
한국에서 해 보지 못했던 래프팅도 경험했다. 중간중간 상당한 급류 때문에 꽤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산타마을에서는 순록을 보고 산타클로스와 사진을 찍기도 했다.
유콘대에 있는 페어뱅크스 북극박물관 방문도 의미 있었다. 입장료는 16달러쯤 됐나? 적지 않은 돈이다. 그래도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알래스카의 식생과 원주민의 문화·역사, 오로라와 관련된 내용이 주로 전시됐다. 특히 천장에 걸린 거대한 고래의 전신 뼈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페어뱅크스에서는 사람이 북적거리는 모습은 볼 수 없다. 축제나 주말 공원을 제외하고는 그렇다. 특이한 점은 ‘빙고’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일과가 끝나면 다들 그곳에서 게임을 하며 친목을 다지는 건가? 들어가 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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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얼마 전 앵커리지에 갔을 때가 생각났다. 시내에서 대낮에 술에 취해 뻗어 있는 노숙자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원주민인 이누이트라고 한다. 알래스카는 원유를 비롯한 자원이 풍부해 주민들에게 세금은 걷지 않고 오히려 보조금을 풍족히 지급한다. 굳이 찾아서 일할 필요가 없다. 그러다 보니 술을 마시게 되고, 결국은 중독된다고 한다. 최근엔 펜타닐 남용까지 겹쳐 문제가 심각하다. 과한 복지는 오히려 폐단이다. 그나마 페어뱅크스에선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계속 이 모습을 유지하길 바란다.
귀국을 일주일쯤 앞두고 환자가 발생했다. 이전에도 가벼운 증상으로 군의관을 찾는 경우는 많았다. 몸살, 타박상, 염좌, 통증 등. 이번에 발생한 환자는 계속 기침을 해댔다. 의심스러웠다. 검사해 보니 코로나19였다. 당장 전수조사에 나섰다. 모두에게 검사도구가 지급되고, 자가검사를 했다. 그 결과 3명이 양성으로 나왔다. 이들은 즉시 분리됐다. 격리된 장소가 숙소 내 우리 건너편 방이었다는 게 얄궂었지만.
문제는 귀국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부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확진자를 여기에 두고 돌아가야 하느냐? 두고 간다면 어디에 어떻게 부탁해야 할까? 같이 간다면 항공기 안에 따로 분리공간을 만들어야 하나? 의견이 분분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창 기승을 부린 코로나19가 점차 세력을 잃어 가면서 정부 방침도 완화됐다는 사실이다. 6월 1일부터 확진자 자가격리는 7일 의무에서 5일 권고로 변경됐다. 이 기준에 맞추니 가까스로 함께 복귀할 수 있게 됐다. 천만다행, 자칫하면 이산가족이 될 뻔했다.
출장을 오면 선물 사는 것도 고민이다. 어떤 것을 골라야 잘 샀다는 소리를 들을까? 그 고민을 없애 줄 품목이 있었다. 장병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그것은 스타벅스에서 파는 컵이다. 원래 핀란드 어느 지방의 스타벅스 매장이 위도가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는데, 그곳이 폐쇄되면서 알래스카에 있는 매장이 최북단이 됐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컵은 이곳 매장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 덕분에 이를 사기 위한 원정대가 생겼다. 수량이 넉넉지 않은지 몇 군데를 돌아야 구할 수 있었다. 나도 흐름에 동참해 에스프레소 크기로 구매했다. 예쁘다. 그런데 어디에 뒀더라. 생각난 김에 집에 가 찾아봐야겠다.
미국은 군인을 향한 존경심이라고 할까, 예우가 확실하다. 일례로 ‘밀리터리 디스카운트’가 있다. 10~20%는 기본이다. 신분증이나 군인임을 알리는 증명서만 있으면 된다. 그 후로 기념품을 사러 갈 땐 최소 군인 한 명은 일행으로 대동한다.
26일 드디어 귀국하는 날이다. 숙소를 같이 썼던 일행은 새벽에 아일슨 공군기지로 향했다. 본대(KC-330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에 앞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KF-16 전투기를 환송하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느긋하게 일어나 여유를 즐기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지에 도착하니 모두 심각한 얼굴이다. 먼저 출발한 KF-16 전투기 한 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산소계통 이상이란다. 충남 서산까지 가기도, 알래스카로 돌아가기도 애매했다. 판단이 조금만 늦으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 마침 알류샨열도에 미군 콜드베이 기지가 있었다. 편대장은 즉시 콜드베이행을 지시했고, 다행히 문제가 생기기 전 착륙했다. 콜드베이에서 정비를 받은 뒤 귀국했다. 모두가 머리를 맞댄 끝에 위기를 모면한 셈이다.
뜻하지 않은 소식에도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기내에 자리한 장병들을 보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거의 한 달이라는 기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훈련하느라 고생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일까. 서산기지 활주로에 바퀴가 닿은 순간 약속도 안 했는데 환호성이 터졌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시 집이, 고국이 최고인가 보다.
28일에 걸친 출장은 막을 내렸다. 생각해 보니 처음 나를 유혹했던 ‘오로라’는 구경도 못 했다. 오로라는 해가 뜨지 않고 밤이 지속되는 극야(極夜) 때나 볼 수 있다. 시기상으로는 9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라고 한다. 6월에 갔으니 꿈도 못 꿀 일이다. 연어 낚시는 딱 시작하는 철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현지 주민에게만 허용되고, 잡는 것도 3마리로 한정됐다고 하니 그림의 떡이다. 라스베이거스는 예전 ‘레드플래그 네바다’라고 해서 미 네바다주의 넬리스 공군기지에서 훈련할 때나 가능했다. 결론적으로 나를 들뜨게 했던 모든 요소는 공수표가 됐다. 그래도 좋았다. 이런 잊지 못할 경험과 기억을 지닐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툭하면 내려와 나를 설득했던 팀장은 알고 보니 천사였다. 그에게 원망이 아닌 고마움을 보낸다.
※‘펜 들고 세계 속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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