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 중국의 해양굴기와 거세진 첩보전
시진핑 체제 출범 이후 해양 진출 적극 시도
아·태 지역 영유권 분쟁 국가 대상 첩보 공세
필리핀, 화교 이용한 스파이 활동 잇단 적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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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화교단체를 첩보활동에 이용
전통적 대륙 국가였던 중국이 2012년 시진핑 체제 출범 이후 적극적인 해양 진출을 시도하면서 남중국해·동중국해의 여러 나라와 분쟁이 격화하고 있다. 최근 필리핀에서 중국의 스파이 활동이 연이어 적발되면서 방첩 강화 여론이 비등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지난 1월 필리핀 국가수사국(NBI)은 중국 인민해방군 육군공정대학을 졸업한 컴퓨터 엔지니어로 필리핀에 5년 이상 체류 중이던 덩위안칭을 체포했다. 그는 필리핀인 2명과 함께 ‘자율주행 개발용’이라고 표시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한 달간 루손섬 일대 군사기지와 발전소 등 기간시설의 위치정보를 수집하다가 적발됐다.
이들이 타고 다닌 차량의 트렁크에서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과 표적시설 내부를 3차원 이미지로 구축할 수 있는 장비가 발견됐으며, 120개가 넘는 중요 시설물의 위치·지형을 센티미터(cm) 단위로 찍은 정밀 데이터가 중국에 전송된 것으로 확인됐다.
일주일 뒤 팔라완섬에선 필리핀 장기거주 화교 왕융이 등 5명이 야자나무 사이에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해 군함의 이동을 감시하고, 해군기지·조선소 등을 드론으로 촬영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들의 휴대전화에서는 군공항과 해군기지 정탐계획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발견됐다고 한다.
왕융이는 2016년 ‘중화평화발전촉진회’를, 2022년에는 ‘차오싱 자원봉사단’을 만들었다. 이들 단체는 중국 공산당의 해외 통일전선공작을 담당하는 ‘중화화교연합회’ 관리를 받고 있었다. 시 주석이 ‘마법의 무기’라고 칭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UFWD)의 화교를 이용한 해외 영향력 확대사업을 지원하는 조직이다.
루손섬에서 체포된 덩위안칭과 팔라완섬에서 검거된 왕융이는 서로 통화한 사실이 있어 이들이 개별적으로 움직인 게 아니라 연계된 것으로 보고 있다. 덩위안칭의 계좌에서 한 유령회사에 정기적으로 170만~1200만 페소(약 4200만~3억 원)의 거액이 송금된 사실도 밝혀져 배후에 대규모 간첩단이 있는 것으로도 추정된다.
정밀 지리정보 수집과 휴대전화 도청
이 사건 한 달 뒤인 2월에는 대통령궁, 미국대사관, 경찰청, 군 기지 주변에서 차량에 설치된 장비로 휴대전화를 도청하던 중국인 2명과 필리핀인 3명이 또 체포됐다. 이들의 차량에서 발견된 ‘국제모바일가입자식별번호(IMSI) 캐처’라고 하는 장비는 반경 1~3㎞ 이내에서 가짜 기지국 역할을 하며 휴대전화와 기지국 사이의 통신을 가로채 도청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친미 성향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취임 이후 필리핀과 중국 간 해상 경계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자 중국이 필리핀 거주 화교들을 활용해 첩보활동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4월 미국이 필리핀 북부 루손섬에 중거리미사일 시스템인 타이푼 포대를 설치한 것도 중국을 자극했을 것이다. 냉전 이후 최초로 외국에 설치된 타이푼 포대는 남중국해와 대만해협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 상당 부분까지 타격할 수 있어 중국에 위협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는 올 1월에도 중국의 국가 지원 해커들이 정부기관의 중요 서류를 수년간 빼내 간 게 알려져 논란이 됐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간첩죄 강화는 물론 호주가 중국의 내정간섭 배제를 위해 2018년 만든 ‘외국 영향력 투명성 제도’를 도입해 외국 단체에서 기부받을 때는 대통령 승인을 받도록 하는 등 가칭 ‘외국 내정간섭 금지법’ 제정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해양굴기와 강화된 아·태 지역 첩보활동
중국은 필리핀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 국가들을 대상으로 공세적인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 대만 국가안전국 발표에 따르면 대만에선 2024년 한 해 동안 중국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 대만인 64명이 적발됐는데, 이들 중 3분의 2인 43명이 전·현직 군인이라고 한다.
또 페이스북, 엑스(X), 틱톡 등 SNS를 이용해 대만의 민주주의를 폄훼하고 친중·반미 여론을 확산하는 중국의 가짜뉴스 유포 공작도 2023년 대비 60%나 증가한 200만 건에 달하고 있다.
일본과는 센카쿠열도를 두고 영유권 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지난해 5월과 7월엔 오키나와 북쪽 해상에 중국의 정찰용 드론이 출현해 일본 전투기가 출동하는 일도 있었다. 이곳 해역의 정보 수집과 함께 군사행동을 늘려 전략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올 2월 말에는 호주 남쪽 태즈먼 해역에서 중국 해군의 구축함·호위함이 사격훈련을 해 최소 49편의 민간항공기가 항로를 변경해야 했다. 공해상에서의 훈련으로 국제법상 문제는 없으나 이 지역에서 중국 해군이 실사격 훈련을 한 것은 처음이어서 호주와 뉴질랜드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달 26일 중국과 200해리 경계가 겹치는 한·중 잠정조치수역(PMZ)에 중국이 무단 설치한 대형 철골구조물에 대한 우리 조사선의 접근을 방해해 양국 경비정이 대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국이 지속적인 구조물 설치로 영유권을 주장할 것으로 의심되는 곳이다. 남중국해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전역에서 중국의 해양굴기 파도가 거세게 일고 있다.
주요 시설 대상 저강도 첩보활동 대응 필요
우리나라에선 지난해 6월 중국인 3명이 부산 해군기지에 입항한 미군 항공모함을 드론으로 촬영하다가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11월에는 국가정보원 청사를 드론으로 찍던 중국인이 체포되기도 했다. 최근 각국에서 중국인 관광객·유학생들의 군사기지·민감시설 주변 사진 촬영, 드론 촬영, 진입 시도를 통한 보안수준 측정 등 다양한 형태의 저강도 첩보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이번 필리핀 사례처럼 자동차에 측정장비를 설치하고, 정밀 지리정보를 수집하거나 차량 탑재 이동형 장비를 활용한 휴대전화 도청 시도가 있을 수도 있다. 최근 중국 전기자동차의 국내 상륙이 임박한 시점에서 중국이 개발한 생성형 인공지능(AI)인 ‘딥시크’가 탑재될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보 유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민감한 정보들이 중국 본사로 전송돼 이를 중국 정부가 활용할 수 있어서다.
미국은 이미 지난달 중국·러시아산 커넥티드카 소프트웨어와 부품의 미국 내 사용 금지조치를 발표했다. 민감시설에서 외부인의 휴대전화 소지를 금지하거나 촬영·녹음 기능을 차단하는 것처럼 스마트자동차의 출입과 관련한 보안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빠른 기술 발전과 위협양상의 변화에 적시 대응할 수 있는 방첩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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