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태극서관, 도자기회사 그리고 청년학우회
“책은 교사, 서점은 교육기관” 독서 강조
‘경제발전=민족운동’ 첫 주식회사 설립
인격수양 표방 ‘청년학우회’ 전국 확산
실제론 독립운동 청년 전위대 조직 의도
강자에 당당하고 약자에 겸손한 인품
강도에 돈 모두 내주며 타이른 일화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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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는 신민회를 창립하고, 각계 지도자를 영입해 조직을 계속 확대했다. 이에 대성학교 설립을 준비하면서 1907년 태극서관, 1908년 평양 마산동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했다. 1909년에는 인격적으로 모범이 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청년학우회를 조직했다.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기 좋아하지 않은 도산은 이들 사업에도 다른 동지를 대표로 세웠으나 실제로는 모두 도산의 아이디어와 지휘로 이뤄졌다. 도산의 경우 일이 잘되면 그뿐, 자신의 명예나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산은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넘어 선공무사(先公無私)의 삶으로 일관했다.
태극서관과 평양자기회사
서적의 출판·판매를 통한 지식 보급과 국민 교육을 위해 도산은 1907년 5월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했다. 전국에 그 지점을 설치할 계획으로 곧이어 서울과 대구에도 만들었다. 평양 태극서관은 이승훈이 사장을 맡고 주임(안태국)과 사무(이덕환)를 뒀다. 태극서관은 학교 교재를 비롯한 도서뿐만 아니라 측량기구와 각종 문구류를 함께 팔았고, 대한매일신보와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소년』의 보급처 역할도 했다. 아울러 태극서관은 신민회 활동을 위한 동지들의 연락 및 집회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도산은 “책사(冊肆)도 학교다. 책은 교사(敎師)다. 책사는 더 무서운 학교요, 책은 더 무서운 교사”라고 했다. 서점도 일종의 교육기관이며 책은 곧 교사라고 해 서점 기능과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평양자기회사는 농상공부의 인가를 받아 1908년 10월 주식회사로 출발했다. 이승훈이 초대 사장을 맡아 평양의 유지 자본가들을 주주로 영입했다. 마산동 일대에는 도자기 원료가 되는 양질의 백토와 석영, 황색 점토가 풍부했다. 이를 이용해 식기를 만들어 보급하고, 나아가 전통적인 조선 도자기 기술을 계승·산업화하려는 것이 도산의 의도였다.
주요한은 도자기 회사를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로 설립한 의의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도산은 경제발전을 민족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주장해 왔다는 것이다. 둘째는 주식회사 형태를 취해 신용과 협동의 연습장으로 삼자는 것이다. 셋째, 본보기를 중요하게 생각한 도산이 모범적인 도자기 회사를 세워 그것을 본받아 전국에 많은 회사가 생기고, 나아가 산업에 대한 국민 인식이 바뀌기를 기대했다는 것이다(『안도산전서』).
인격을 갖춘 미래 지도자 양성
1909년 8월 공개 조직으로 청년학우회를 창립했다. 윤치호가 중앙위원장, 최남선이 중앙 총무를 맡았다. 지방 조직은 한성 분회를 위시해 개성·평양·안악·안주·선천·곽산·용천·의주 등으로 확산했다. 청년학우회 목적은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생활 훈련에 힘쓰며, 한 가지 이상의 전문지식이나 기술을 반드시 학습해 직업인의 자격을 갖추고, 매일 덕육·체육·지육에 관한 수련에 힘쓴다”고 돼 있다(『안도산전서』). 표면상 인격 훈련에 집중돼 있으나 실제로는 독립운동의 청년 전위대를 조직하고자 했다. 일제의 통감 정치가 실시되던 당시 모든 집회와 단체의 조직은 당국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청년운동을 정치운동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면서 국민적 자각, 민족적 자각, 역사적 자각, 사회적 자각을 지닌 진실과 실질을 숭상하는 인물을 결집하고 훈련해 독립운동에 대비하자는 것이 도산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회원은 통상회원과 특별회원으로 구분했다. 통상회원은 17세 이상으로 중학교 이상의 학력을 갖추고 품행이 단정한 자를 엄격하게 심사해 선발했다. 특별회원은 나이 구분 없이 이 회의 취지에 찬동하는 자로 특별 심사를 거쳐 입회했다.
도산은 최남선에게 청년학우회의 기본 취지를 설명하고, ‘창립 취지서’를 초안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최남선은 문장력이 뛰어난 신채호에게 취지서 작성을 의뢰했고, 그가 작성한 초안을 자신이 줄이고 다듬었다.
춘원 이광수에 의하면 도산은 최광옥(崔光玉·1879~1910)을 청년학우회의 모범 인물로 삼으려 했다. “최광옥은 기독교인으로 행실이 반듯하고 애국심이 강하며, 국어를 연구해 최초의 문법책을 지었고, 문장력과 언변도 뛰어날 뿐 아니라 도산의 사상과 민족운동 방책을 잘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따랐다.”
도산은 청년학우회를 통해 한 점 흠 없는 인격을 지닌 민족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래서 도산이 그토록 신뢰하고 사랑하는 동지 이갑조차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격성’ 때문에 청년학우회 회원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정성을 들인 청년학우회는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다. 그러나 그 취지와 운동 방법은 1913년 미주에서 조직한 흥사단을 통해 그대로 계승된다.
도둑도 감화시킨 도산의 인격
한편 도산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이 무렵의 일화가 전해진다. 도산이 여행 중 강서군에 있는 되다리 근방에서 밤중에 강도를 만났다. 돈을 털어주고 나서 도산은 “도적질은 죄가 되니 다시는 도적질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강도를 만나서도 동요함이 없는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도적 중의 하나가 도산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당신은 안창호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다” 하니, 돈을 도로 내어놓으며 아무리 도적일지라도 ‘안창호 선생’을 해칠 수는 없다고 했다. 도산은 “어서 그 돈을 가지고 가서 밑천으로 삼아 장사를 해 다시는 도적질하지 말라” 하니, 도적이 울면서 물러가서 바른 사람이 됐다는 전설이 강서 근방에서 전해진다(『안도산전서』).
이 일화를 들으면 나이 지긋한 도인이 연상될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도산은 30세를 갓 넘긴 젊은이였다. 그런 도산이 어떻게 이처럼 담대할 수 있을까? 그 답은 그의 인격에 있다. 도산의 인격적 특징은 사욕(私慾)이 없고, 열등감이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교만함과 비굴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그 본질은 열등감이다. 도산은 열등감이 없기에 강자 앞에서도 당당하고, 약자에게 겸손했다. 사욕이 없으므로 헛된 명예와 부당한 이익을 탐내지 않았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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