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우리 곁에, 예술

길모퉁이 돌면… 잠깐의 여유가

입력 2025. 03. 06   16:14
업데이트 2025. 03. 06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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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예술 - 전시 공간 & 전시 아트선재센터와 ‘하종현 5975’ 展 

절제의 건축미학 만나고
건축가 김종성 작품 ‘아트선재센터’
여러 수상 경력 건축적 가치·완성도 증명
단색화 거장과 ‘접합’하다 
한국 현대미술 대표 작가 하종현
‘배압법’ 사용 대표작 ‘접합’ 시리즈
초창기 작품 4개 시기 나눠 소개

 

‘하종현 5975’ 전시 전경(3층, 한국아방가르드협회-새로운 미술 운동 시기).
‘하종현 5975’ 전시 전경(3층, 한국아방가르드협회-새로운 미술 운동 시기).

 


서울 종로구 소격동 일대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갤러리와 전시 공간이 밀집해 있는 문화예술지구다. 많은 관광객이 오고 가는 이 거리에서는 전시를 소개하는 현수막과 배너 등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발길 닿는 대로 전시 공간을 방문하다 보면 다양한 예술을 접하면서 생기는 새로운 시각과 생각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 소격동 거리에는 정독도서관을 대각선으로 두고 길모퉁이에 동시대 미술을 소개하고, 한국과 세계의 미술을 연결하는 아트선재센터가 있다. 1998년 개관한 아트선재센터는 대우재단 설립자이며, 문화예술 후원자인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이 설립한 사립미술관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정 회장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들의 이름을 붙여 1991년 경주에 선재미술관(현 우양미술관)을, 1998년 서울에 아트선재센터를 설립했다.

아트선재센터는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종성(1935~ )의 작품이다. 김종성은 현대건축의 거장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다. 로에는 건축의 기본 요소에 충실한 절제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길모퉁이에 있지만 곡선을 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듯한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전시를 보기 위해 건물로 들어서기 전 한숨 돌릴 여유가 느껴진다. 1999년 한국건축가협회상 본상, 1998년 한국건축가협회 엄덕문상 특선, 한국건축문화대상 준공 입선이라는 여러 수상 경력은 아트선재센터의 건축적 가치와 완성도를 증명한다.


아트선재센터
아트선재센터



아트선재센터 내부는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으로 이뤄져 있다. 지상 1층 더 그라운드와 2·3층의 스페이스 1, 2 공간이 주로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지하 1층은 238개의 객석과 무대를 갖춘 아트홀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스페이스 1, 2에서 ‘하종현 5975’(2025.2.14~4.20)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아트선재센터는 동시대 미술 흐름에 주목하고, 여러 장르와 주제의 전시를 관람객에게 소개해 왔다. 아트선재센터 전시를 통해 발굴된 젊은 작가들은 세계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간 새로운 작가의 조명·발굴에 힘쓰며, 회화·조각뿐만 아니라 설치와 비디오 아트 등 각양각색의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는 전시를 개최했다면 이번 ‘하종현 5975’는 미술사적 접근으로 특정 제작 시기 작품을 모았다.

특히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작가 하종현(1935~ )의 초기 작품을 소개한다. 하종현은 주로 단색화로 잘 알려졌다. 단색화는 단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표현하기보다 하나의 색 또는 단일 계통 색으로 화면을 채운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의 색만을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물감과 붓·캔버스 등 재료 자체에 집중하고, 화면을 채우는 붓질과 긋기 등 작가의 신체적인 행위에 주목한다. 작품 창작에 있어 새로운 시도와 표현 방식을 탐구하고, 작품의 명상적·내면적 특징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단색화가 시작됐고, 지금까지도 주요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종현 작가 또한 1970년대 초부터 ‘배압법’이라는 자신만의 방식을 사용했다. 배압법은 마대를 활용한 캔버스 뒷면에 물감을 두껍게 바른 후 강한 압력을 가해 캔버스 앞면으로 밀어내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제작한 ‘접합’ 시리즈는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작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하종현 5975’ 전시는 배압법이라는 작가만의 주요 방식을 만들어내기 전 1959년부터 1975년까지의 작업을 집중 소개한다. 이 기간은 70여 년에 이르는 작가의 활동기 중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다. 작가의 대표적인 ‘접합’ 작품만이 아니라 작업을 시작한 초기 시기와 현재 작업으로 나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시다.

전시는 작가가 미술대학을 졸업한 1959년부터 그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접합’ 연작을 시작한 직후인 1975년까지의 작품을 4개 시기로 나눠 소개한다. 작품을 순차적으로 보고자 한다면 2층 전시실부터, 1975년 하종현 작가의 대표적 기법인 배압법을 활용한 작품을 먼저 보고자 한다면 3층 전시실부터 관람하면 된다.

우선 2층 전시실에서는 ‘전후의 황폐한 현실과 앵포르멜 1959-1965’ ‘도시화와 기하학적 추상 1967-1970’이라는 주제로 나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앵포르멜은 전후 1950년대 유럽에서 유행한 추상미술 경향으로 ‘비정형’, 즉 형태가 없다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다.

작가 또한 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황폐한 사회를 거친 표면과 어두운 색으로 표현했음을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앞선 작품과 다른 기하학적인 추상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반복적인 패턴으로 도시화·산업화의 과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는데, 단색화와는 또 다른 경향의 작품들이다.

3층 전시실에서는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새로운 미술 운동 시기 1969-1975’ ‘접합-배압법 1974-1975’ 작품들이 설치돼 있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라는 실험적 운동에 참여하며 작품에 새로운 접근 방식을 도입하고, 일상적 재료를 활용한 작품들은 작가의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면모를 확인시켜 준다.

신문이나 휴지, 스프링 등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재료를 붙이거나 가시철망을 캔버스에 감싼 작품 등은 전통적인 회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평면의 회화 안에서 입체감을 만들어낸다. 배압법으로 제작된 작품 또한 캔버스 뒷면에서 밀려 나온 물감의 질감이 평평한 화면을 넘어 입체적 물질감을 보는 사람에게 전달한다. 전시실의 고요함과 달리 작품들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보는 사람을 새로운 미술의 세계로 이끈다.

이처럼 한국 미술계 원로 작가의 작업 세계를 전반적으로 조명하며, 특정 시기의 작품을 모아 집약적으로 소개한다는 측면에서 ‘하종현 5975’는 흔치 않은 전시다. 전시를 안내하는 글을 읽고 작품을 하나하나 관찰하다 보면 어렵게 느껴지던 현대미술이 재미있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단색화로 대표되는 하종현 작가의 다채로운 작업 방식과 실험적이고 새로운 작품들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폭넓은 관점을 갖는 기회가 될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김유진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문을 썼고, 문화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예술을 연구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필자 김유진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문을 썼고, 문화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예술을 연구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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