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양평 산포수들 의병을 일으키다
포군 김백선, 유생 이춘영과 의기투합
지평의병 봉기…세력 불려 일본군 공격
병참기지 점령 코앞서 중과부적 퇴각
원군 미동원 항의하다 군령 위반 처형
사후에도 양평지역 의병 활발히 활동
영국 종군기자 취재 통해 널리 알려져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 ‘국맥지평의병발상지’라고 쓴 석비가 우뚝 서 있다. 국가의 맥을 이은 지평 의병운동이 일어난 곳임을 알린다. 그 중심에 김백선이 있었다. 김백선(1849~1896)은 양평의 몰락한 양반가 출신인 산포수였다.
1894년 폭정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일으킨 동학란이 경기 지평까지 옮겨왔다.
김백선은 이 시기 실록에 등장한다. 『승정원일기』는 1894년 9월 26일 기록에서 “지평현의 비도 수백 명이 홍천에 접(接)을 설치하고 약탈을 자행해 감역(監役) 맹영재가 포군(砲軍) 100여 명을 거느리고 무뢰배들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포군 김백선이 부상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실록이 ‘비도((匪徒)’로 표기한 동학군이 뜨면 관리와 백성들이 두려워 피하기만 하던 상황에서 포군들의 활약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맹영재는 그 공으로 지평군수가 됐고, 김백선을 포함한 포군 7명은 절충장군에 올랐다(『승정원일기』 고종 31년 11월 7일). 절충장군은 정3품 벼슬이어서 상민 출신 포수로서는 대단한 신분 상승이었다.
이듬해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을미사변으로 항일 기운이 고조되자 김백선의 의병은 동학군이 아닌 일본군에 맞선다. 김백선은 단발령(斷髮令)이 발표되자 군수 맹영재를 찾아가 의병을 일으키자고 제안했다가 거부당하자 맹영재를 크게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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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변을 당하는데 신민이라면 목숨을 걸고 적을 무찔러야 하지 않겠는가. 겨우 동학을 치고 벼슬을 얻은 것이 무슨 영화가 되겠느냐?” 김백선은 지니고 있던 총을 부숴 관아 마당에 내던졌다.
이웃 여주 유생 이춘영(1869~1896)이 찾아와 의거를 제안하면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김백선은 지평 관아 소속 포군 400여 명을 모아 시국을 규탄하고 의거를 호소했다. 포군은 모두 그의 뜻을 따르기로 결의했다. 김백선과 이춘영은 포수들과 함께 1896년 1월 강원 원주 안창리에서 기의했다. 이들에게는 ‘지평의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 안승우와 평민들이 합쳐 그 수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지평의병은 원주 관아를 점령한 데 이어 충청북도 제천으로 진격했다. 2월 7일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제천의병과 연합해 ‘호좌의진(湖左義陣)’을 구성했다. ‘호좌’는 충청북도를 일컬었다.
김백선은 유인석 부대의 선봉장을 맡아 충주성전투에서 승리해 충주관찰사를 처단했다. 2월 23일 수안보전투에서도 승리했지만 중군장이던 이춘영을 잃었다. 3월 18일부터 이틀간은 경기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다. 진지 점령을 진행하던 중 점령을 눈앞에 두고도 중과부적으로 퇴각해야 했다.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은 탓이었다.
김백선은 분노했다. 그는 중군장 안승우에게 칼을 뽑아 든 채 거세게 항의했다. 안승우가 ‘대장을 옹위해야 하는 게 중군의 소임이라 병사를 함부로 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유인석이 대로하며 김백선의 상민 신분을 문제 삼아 군령 위반죄로 공개 총살에 처했다(『국맥지평의병』).
지도부인 양반 유생과 병사인 포군 간에는 늘 신분 갈등이 있었다. ‘물질의 세계에 맞서는 정신의 세계가 곧 중화(中華)’이며 ‘의병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을 갖춰야 한다’는 안승우의 ‘의병정신’ 언급(『구한말 의병전쟁과 유교적 애국사상』, 박성수)에도 성리학적 분위기가 배어 있다고 구보는 여긴다.
선망의 대상이던 맹장 김백선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자 포군의 사기도 떨어져 군진에서 이탈하면서 전투력이 저하됐다. 제천의병은 5월 25일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이후 도주를 거듭해 8월 압록강을 넘어 만주의 회인현까지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무장해제당했다.
1907년 일본은 ‘정미7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저항하는 의병운동이 다시 전국에서 일었다. 양평에서도 50여 명의 의병부대가 친일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했다. 김백선 이후 양평의 의병활동이어서 ‘후기 의병’으로 부른다.
1907년 8월 24일 용문사에서 권득수가 지휘하는 의병 200여 명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일본토벌대가 의병의 군량과 군수물자를 불태우면서 천년고찰 용문사도 소실됐다. 11월 7일부터 이틀간은 각지에서 모인 의병 5000명이 양동면 삼산리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의병활동이 거세지자 일제는 대규모 군대를 양평에 파견했다(『국맥지평의병』). 영국 ‘데일리 메일’의 종군기자 프레드릭 매켄지(1869~1931)가 러일전쟁 취재차 1904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데 이어 1906년 재방문했다가 양평 의병 사진을 찍었다.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인으로 보이는 군복 차림의 지휘자와 10여 명의 의병이 거총 자세를 취한 사진이다.
매켄지는 1년6개월간 의병 활동을 취재한 저서 『The Tragedy of Korea』에 ‘대한제국 의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을 실으면서 “일본군이 부락을 불태우면 의병 수가 그만큼 늘어났다”고 썼다. 그들은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겠다’며 ‘무기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다고 전했다. 구보는 정부로부터 받은 은혜도 없으면서 국난을 당하자 분연히 일어선 것은 백성 개개인의 마음속에 ‘대한(大韓)의 혼’이 살아 있던 까닭일 터로 여긴다.
매켄지는 당시 일본이 ‘의병 진압을 위해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기록했다. 양평 일대 의병 활동은 소규모 집단의 유격전으로 변화하며 1910년까지 40여 회의 전투를 치렀다. 일제의 발표로는 의병운동이 1915년에 이르러 진압됐다.
일본 측 통계를 보면 부상병이나 포로들에 관한 언급이 일절 없다. “일본군은 보이는 대로 의병들을 참살했다. 가옥을 불태우고 협조자도 죽였다”는 매켄지의 언급에서 구보는 일본군의 의병 진압 실상을 읽는다. 매켄지가 기술한 의병들의 면면은 구한국군을 위시해 산악인, 농민, 호랑이 사냥꾼 등이었다. ‘호랑이 사냥꾼’은 김백선과 같은 포수 출신을 일컬음이다.
구보는 조직이건 국가건 바깥에서의 공격이 강하더라도 내부가 균형을 유지하면 두려울 게 없다는 평소 생각을 재확인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 무장투쟁’을 펼친 호좌의병은 산포수 김백선을 처형함으로써 내부 균형을 잃고 무력해져 버렸다. 리더십의 한계였다. 김백선 장군에게는 1968년과 1991년 대통령 표창·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군기 문란으로 처형된 탓에 유인석과 안승우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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