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때 그곳 - 순화궁, 요릿집이 된 별궁
세종 손녀 길안현주·구수영 저택
인조 생모 인헌왕후 구씨 태어나
헌종 후궁 경빈 김씨 기거 ‘순화궁’ 돼
고종 ‘한성 중심지’ 표지석 지번 기준
안순환 고급 요릿집 ‘태화관’ 열어
민족 대표 33인 모여 독립선언식
현재 하나로빌딩·태화빌딩 세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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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서남쪽 하나로빌딩과 태화빌딩은 순화궁 터였다. 원래는 세종의 손녀 길안현주 이억천과 남편 구수영의 저택이었다. 능성 구씨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능성 구씨 가옥’으로 불렀다.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 구씨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예전 공평동 일대는 이문안(二門內)이라 칭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어린 시절을 보낸 외가 입구에 두 문을 세운 게 연유였다. 위세가 대단해 순라꾼도 이 문을 들어가지 못했을 정도로 통제가 심했다(『연암집』). 노포 이문설렁탕 간판에 그 흔적이 남았다.
순조 때는 ‘장김’으로 좌의정을 지낸 김홍근(1788~1842)이 소유했으나 헌종 사후 경빈 김씨가 기거하면서 궁호를 따 ‘순화궁(順和宮)’으로 불렀다. 광산 김씨인 경빈은 15세에 후궁으로 간택돼 정1품인 빈(嬪)에 올랐다. 헌종은 창덕궁 낙선재 내에 석복헌을 지어 처소로 줬을 만큼 경빈을 총애했다(『국가유산포털』).
왕실의 경빈에 대한 대우는 극진했다. 1848년 헌종 14년에 열린 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육순 축하연을 기록한 『헌종무신진찬의궤』에는 대왕대비전과 중궁전 다음으로 순화궁 김씨에게 올린 요리들이 기록돼 있다. 헌종이 22세로 요절하면서 2년간의 짧은 결혼생활을 뒤로한 채 김씨는 17세의 나이로 궁을 떠나 별궁인 순화궁으로 옮겨 갔다.
경빈은 시조모 순원왕후와 시모 신정왕후, 그리고 정비인 효정왕후에게 정성을 다하며 유대관계를 맺었다. 왕실에서도 주요 행사 때마다 경빈을 주요 어른으로 예우했다. 경빈은 순화궁에서 왕실 의복에 관한 기록인 『순화궁첩초』를 쓰고, 봉은사의 괘불도 제작을 지원하며(『국가유산포털』) 58년의 세월을 보냈다. 순화궁의 예산은 호조가 해마다 지원하다가 고종 때 선혜청이 매년 4000냥씩 지급하는 걸로 바꾸었다(『고종실록』, 3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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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에는 고종이 대한제국의 칭제건원을 앞두고 순화궁에 ‘한성 중심지’ 표지석을 세웠다. 그때부터 순화궁이 전국 지번의 기준이 됐다. ‘관훈동 194번지’였다. 강남이 편입되기 전 서울의 정중앙이었다(『역사문화유적을 찾아』, 서울시).
1907년 경빈이 세상을 뜨자 고종이 직접 조문을 지었다. “지난날 극진하게 예우해 주던 은혜를 추념함에 처참한 심정을 말로 다할 수 없다(『고종실록』, 44년 6월 1일).” 구보는 고종의 조사에서도 경빈의 처신이 조신했음을 짐작한다. 경빈 사망 한 달 후 고종이 강제 퇴위하면서 시국이 어수선해졌다. 그 와중에도 왕실은 경빈의 2주기 제사에 이완용을 보내 모시게 했다(『승정원일기』, 순종 3년 4월 18일).
순화궁은 경빈 사후 흥선대원군의 사위 이윤용이 차지했다가 1908년 이복동생 이완용에게 넘겼다. 훗날 죽농 안순환(1871~1942)이 이곳을 태화관으로 변신시킨다. 고급 요리점이었다. 죽농은 영남 태생으로 1900년 전환국 기사로 임용돼 1년간 일하다 그만둔 뒤(『승정원일기』, 고종 38년 10월 24일), 요식업 개설에 뜻을 둬 1903년 현 세종로 동아일보 사옥 터에 요릿집 명월관을 열었다. 1908년 9월 17일 개업 5주년을 맞아 “명월관이 국기를 달고 기념식을 가졌다”고 ‘대한매일신보’가 익일자로 보도했다.
명월관은 1907년 궁내부가 폐지되자 황실 숙수들을 고용해 시그니처 메뉴로 ‘교자상 요리’를 뒀다. 연회가 끝난 후 임금이 하사하는 음식을 여러 명이 둘러앉아 함께 먹던 것이었는데, 네 명이 한 상을 받는 것으로 죽농이 변경했다. 물론 궁중 음식들로 상차림을 꾸몄다. 1909년 관기(官妓) 제도가 폐지돼 오갈 데 없어진 기녀들을 고용해 공연도 펼쳤다. 시, 글씨, 그림, 춤, 노래, 악기 연주, 예절 등의 소양을 두루 갖춘 기녀들에게 명월관은 안성맞춤 일터였다. 명월관은 이내 장안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합병 이후에는 기생조합인 한양권번과 평양권번 기생까지 가세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면서 고관대작과 거상, 그리고 일본인까지 찾았다(『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왕실 연회를 맛보고, 귀족의 풍류를 즐긴다는 점이 호기심을 부추겼을 것으로 구보는 짐작한다.
1908년 죽농은 대한제국 전선사(典膳司)의 6품 장선(掌膳)으로 임명됐다(『승정원일기』, 순종 2년 12월 15일). 옛 대령숙수 격이었다. 일상적인 궁중 음식은 상궁들이 조리했지만 생일이나 혼인 잔치는 숙수가 맡았고, 사신 접대나 경축연·임금의 연향 때는 최고수인 대령숙수들이 동원됐다.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의 순행을 수행하고(‘대한제국 관보’, 1908.12.21.), 순종의 서쪽 순시 때 호종한(『승정원일기』, 1909.1.21.) 죽농은 정3품 당상관까지 품계가 올랐다(『순종실록』, 1910.8.19.). 1910년 8월 29일 합병 이후에는 이왕직(李王職) 사무관에 임명됐다(‘조선총독관보’, 1911.2.1.).
공직에 있으면서 겸업하던 명월관은 궁중음식과 예기(藝妓)의 존재 덕에 사업이 날로 번창했다. 1914년엔 대한매일신보에 커다랗게 광고를 싣기도 했다. 1915년 이완용 별장(순화궁)에 ‘태화관’이라는 양식 호텔이 들어섰는데(‘매일신보’, 1.19) 벼락이 치고 나무가 불에 타자 이완용이 불길하게 느꼈다.
1918년 죽농이 이를 임대해 명월관 별관을 냈다. 1919년 5월 23일 명월관에 화재가 발생하자 명월관 간판을 장춘관 주인이던 이종구에게 내줘 현 종로 3가 피카디리극장 자리에 개업하게 하고서 자신은 태화관 운영에 열중했다(『명월관과 태화관』).
죽농은 향긋한 분 냄새가 가득했던 명월관과 달리 태화관을 양반가의 사랑방 개념으로 꾸몄다. 서예가 해강 김규진에게 배워 대나무와 란 등의 서화에 능했던 죽농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명사들의 시회(詩會)에 대비해 벼루와 붓, 종이를 비치했다(『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명사들이 자연히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 태화관에서 1919년 3월 1일 손병희, 최남선, 한용운, 최린 등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손병희는 태화관이 피해 볼 것을 우려해 죽농으로 하여금 종로경찰서에 신고하라고 배려했다. 태화관은 일본 경찰의 요시찰 대상으로 있다가 1921년 미국 선교단체에 건물이 매각되면서 문을 닫았다. 태화관의 소멸과 함께 순화궁도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접었다.
장구한 궤적을 남긴 순화궁 스스로는 어느 시절이 가장 좋았을까. 그 시간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17세 경빈이 75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서로 의지하며 조붓하게 함께 지낸 시간이 아니었을까, 구보는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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