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붉은 사막 이카, 모래바람 속으로
사막을 보기 전까진 사막이 뭐가 그리 대단할까 싶었다. 흔하디흔한 모래가 모인 걸 굳이 찾아보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여행작가로 20년 이상 살면서 수많은 사막을 봤다. ‘이카’는 내 인생 최초의 사막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얼마나 하찮은가? 지구는 푸른 별이지만 체감할 수 없듯, 모래의 세상도 상상과 실제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연은 언제나 위대하며, 인간은 헤아릴 수도 거스를 수도 없음을 사막에서 깨닫는다.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알갱이가 무수해지면 모든 생명을 집어삼킬 수도 있으며, 인간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킨 뒤 풍경의 힘만으로 포위할 수도 있다. 누구라도 인생에 꼭 한 번은 사막을 봤으면 한다.
사막인가, 놀이공원인가
이카 사막은 페루 수도 리마에서 약 300㎞ 남쪽에 위치해 있다. 태평양과 맞닿아 있어 일반적인 내륙 사막과는 다른 독특한 기후를 형성한다. 해안 사막답게 연중 강수량이 거의 없으며, 건조하지만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자주 낀다. 이러한 해무를 ‘가르우아(Garuua)’라고 한다. 가르우아의 영향으로 극단적인 온도 변화 없이 온화한 기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카 사막의 명물 버기카가 아찔한 속도로 질주하며, 오아시스 마을 와카치나는 거짓말처럼 또 다른 아름다움을 뽐낸다. 사막 속 물의 마을이라! 이 얼마나 특별하고, 신비로운가. 아이스크림을 팔고, 싸구려 기념품을 판매하는 흔하디흔한 광경도 여기가 사막임을 인지하는 순간 더없이 특별해진다. 어떤 사람은 버기카에서 비명을 질러대고, 어떤 이는 석양을 마주하고 맥주캔을 딴다. 우리는 한 번도 고요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막의 절대적 고요와 깨끗한 풍경에 넋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사람도 모래를 닮아 작아지고 부드러워진다. 사막은 고요함과 가장 작은 것들로 이뤄진 교향곡 같은 곳이다. 바쁜 도시의 일상에 지친 이들에겐 그야말로 충격적인 곳이 아닐 수 없다. 아주 조용하고, 결이 고운 충격.
위대한 문명이 탄생한 곳
이곳엔 2개의 위대한 문명이 존재했다. 머리뼈를 길게 늘이는 기괴한 풍습으로 유명한 파라카스 문화(기원전 800~100년)와 거대한 지상 그림을 남긴 나스카 문명(기원전 200년~기원후 600년). 그들은 도시를 만들고, 예술을 창조하고, 신에게 기도했다. 풀 한 포기 나올 수 없는 땅을 우린 불모지라고 한다. 그래서 사막을 우리는 불모지라고 부른다. 발전 가능성이 없는 환경을 비유할 때도 불모지란 표현을 쓴다. 이카인들은 가혹한 사막을 문명의 꽃으로 피워 냈다. 수 ㎞에 달하는 지하 수로 ‘푸케오스(Puquios)’를 건설해 물을 끌어들였다. 푸케오스는 바람을 이용해 지하의 물을 지속적으로 흐르게 하는 독창적인 수리시설이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에서 안정적인 물 공급으로 농사까지 가능했다. 지금도 놀랍기만 한 혁신적 기술이어서 조금은 당혹스럽고, 마냥 신비롭다. 외계인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기에 우리는 나스카 문명을 이야기할 때 곧잘 외계인을 들먹인다.
가성비 최고의 사막
이카 사막에 개별적으로 올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행사를 통한다. 사막 입구에서 버기카를 타는 곳까지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보통 사막을 보기 위해선 한참을 들어가야 한다. 모로코 사하라 사막에서도 낙타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들어가야 우리가 원하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진짜 사막이란, 여행자가 기대하는 사막을 말한다. 건물이나 풀 등으로 모래 순도를 방해하는 번잡한 사막 말고, 모래만으로도 가득한 세상이 ‘진짜 사막’이다.
이카 사막은 바로 순도 100% 사막으로 시작한다. 여러 사막을 돌면 이카 사막이 얼마나 친절한 사막인지, 가성비가 뛰어난 사막인지 알게 된다. 단 10분, 아니 걸음이 빠른 사람은 5분이면 족하다. 5분 안에 출중하고, 흠 하나 없는 모래 세상에 풍덩 빠질 수 있다.
외계인의 스케치북이었을까-나스카 라인
그게 다가 아니다. 이카시에서 남쪽으로 120㎞ 떨어진 곳에 페루의 또 다른 신비로운 장소가 있다. 바로 나스카 라인이다. 이 선들은 누가 왜 그렸을까? 이 질문은 오랜 세월 수많은 학자와 여행자를 사로잡아 왔다. 이 거대한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나스카 투어는 경비행기를 타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경비행기라도 여권은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 멀미에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스카 라인을 더는 안 봐도 좋으니 제발 내려만 달라고 빌고 싶을 정도였다.
800개 이상의 직선, 300개 이상의 기하학적 도형, 80개 이상의 동물·식물 그림이 나스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어떤 그림은 또렷하고, 어떤 그림은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그 어떤 정답도 없으니 그 어떤 상상도 가능하다. 우주인이 공중에서 이렇게도 그려 보고, 저렇게도 그려 보고…. 원래는 낙서였으니, 지우고 가려 했으나 무슨 사정이 생겨 칠칠치 못하게 흔적을 남긴 건 아닐까?
막상 보면 별것 아니라며 실망하는 이도 많다. 상상을 보태지 않고 그림만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태와 크기가 아닌, 그 그림이 발견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상상해 본다면 왜 나스카 라인이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풍경인지 납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엄청난 비, 사막의 기적 혹은 재난
현재 여행 인솔자 신분으로 남미를 돌고 있다. 이카 사막은 여러 번 왔지만, 비가 오는 이카 사막은 처음이다. 사막은 당연히 비가 귀하다. 오아시스는 사막에서 물이 솟아나와 사람이나 식물이 살 수 있는 곳이란 뜻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한 줄기 빛, 희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카 사막은 1년에 한두 번 비가 올까 말까 한 곳이다. 우리가 간 날 장대비가 퍼부었다. 길이 침수되고, 도로에선 차들이 엉켜 난리도 아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페루에선 국가적 재난으로 뉴스에 도배까지 됐다고 한다. 사막을 찾았더니 장대비가 쏟아지다니. 여행자에게 이보다 지독한 불운이 있을까? 그러나 물을 기다리는 이들에겐 소중한 날이었을 것이다. 어떤 상황도, 사물도 이렇게나 의미가 달라진다. 내가 비를 뿌린 것도 아닌데 여행자들에게 마냥 미안하기만 했다.
“사막에서 비를 보다니. 우리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인가 봐요.” 누군가가 그리 말하자 모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우린 좋은 결과를 바라며 살지만, 사실 태도가 행복을 결정한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겐 불운이 누군가에겐 행운이 된다. 비가 왔다고 투덜대도 달라지는 건 없다. 정말 특별한 날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비는 축복이 된다. 박수 칠 일이 된다.
모래가 모여 결국 아름다운 사막이 되듯이 우리 인간도 모여 푸른 별이 됐다. 기쁨과 긍정으로 가득한 사람이 많을수록, 지구별은 더욱 푸르러질 것이다. 이카 사막에서 얻은 뜻깊은 교훈이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