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버지와 아시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글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건너가 영주권을 얻은 뒤 복수국적으로 살아갔다. 미국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기억은 한글을 배우는 장면이 마지막이다. 미국에서는 늘 ‘이방인’이란 소리를 들으며 대한민국과 한국어 향수에 젖어 지냈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부모님은 한국행을 택하셨다. 15년 만에 한국에 들어오니 안정감과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회복돼 가던 어느 날, 부모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며 희망사항을 말씀드렸다.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습니다.”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부모님은 병역과 학업 문제를 걱정하셨지만, 결국 허락해 주셨다.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자 노력했다. 자신감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학교 친구들과 쉬이 어울리지 못했고, 앞으로 나서는 게 힘들었다.
하루는 방과 후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해병대 전우회 옷을 입은 아저씨가 옆에 앉아 말을 걸어왔다. “학생, 표정이 어두운데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다며 다독이면서 긴 이야기를 들어주신 아저씨는 “사람 사는 건 다 그래”라며 “자신의 모습대로 자신 있게 살아가는 게 멋있는 것”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학생에게 다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속 응어리를 어루만져 준 뒤 홀연히 떠나간 해병대 아저씨가 정말 멋있게 느껴졌다. 해병대는 이렇게 우연히 내 삶에 스며들었다. 당당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마음을 건네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 소망을 위해 지난해 12월 30일 교육훈련단 정문에 성큼 발을 내디뎠다.
1월 1일 새해 첫날과 설날 연휴까지 훈련소에서 보내고 훌쩍 6주가 지나 이제 수료를 앞두고 있다. ‘빨간명찰’을 가슴에 다는 순간 ‘전우애’라는 단어가 가슴 깊이 새겨졌다. 천자봉 고지 정복훈련에서 유독 다른 전우들에 비해 뒤처지던 나를 밀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은 옆의 동기였다. 매일 아침을 깨우는 뜀걸음을 유독 힘들어했던 내 등을 밀며 함께해 준 것도 뒤에서 달리던 동기였다.
학교 앞에서 마음을 어루만져 준 선배 해병께 정모를 쓰고 ‘해병의 긍지’를 외고 있는 모습을 꼭 보여 주고 싶다. 첫 휴가를 받으면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갈 뻔했던 나를 삶의 ‘도전자’로 만들어 준 기적이 있었던 그 공원 벤치를 찾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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