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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여 무궁하라…한국 뮤지컬 역사 함께했던 30년 감동이 더 진해졌다

입력 2025. 02. 18   15:57
업데이트 2025. 02. 1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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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명성황후’ 

1995년 12월 초연…30주년 기념공연 이어져
꾸준한 작품 업그레이드로 ‘국민뮤지컬’ 자리매김
김소현·손준호 명성황후·고종 해석 달라져
한국 뮤지컬사 가장 박력 있는 피날레 강렬해 

 

‘뮤지컬 명성황후’ 명성황후 역 김소현(왼쪽), 고종 역 손준호. 사진=에이콤
‘뮤지컬 명성황후’ 명성황후 역 김소현(왼쪽), 고종 역 손준호. 사진=에이콤



명성황후(1851~1895)의 일대기를 다룬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 뮤지컬. 1995년 12월 초연된 이 작품은 이후 ‘○○주년 기념 공연’ 식으로 나름 의미있는 해에 무대에 올려지곤 했는데, 2025년인 올해는 30주년 기념 공연이 된다.

명성황후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역사적 고증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초연 때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붙고 있지만, 막대한 자본과 새로운 무대기술로 무장한 후배 뮤지컬들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며(무려 30년이다!) ‘국민뮤지컬’로 사랑받고 있을 정도로 매력 있는 작품임은 틀림없다.

‘명성황후’는 이문열 작가의 희곡 ‘여우사냥’이 원작이다. 작곡과 작사를 맡은 인물이 김희갑, 양인자 부부라는 점은 꽤 흥미롭다. 요즘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일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1980년대 대한민국 가요계 넘사벽의 히트곡 메이커였다. 기타 연주자이기도 했던 김희갑이 멜로디를 만들면 소설가인 양인자가 가사를 붙여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했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김국환의 ‘타타타’,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의 듀엣곡 ‘향수’ 같은 명작들이 이들의 대표작이라 하겠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대중가요와는 스타일도 스케일도 전혀 다른 대형 뮤지컬 넘버들을 만들었고, 그 결과물 또한 매우 훌륭했다는 사실이다. ‘명성황후’는 이들의 첫 번째 뮤지컬 작품이기도 했다.

‘명성황후’는 음악감독이라는 직종을 탄생시킨 작품이기도 했다. 초연 당시 배우들 노래와 오케스트라 연습, 녹음 등의 작업을 담당했던 인물이 박칼린이었고,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한국 제1호 음악감독’ 이름을 얻게 된다.

제작사 에이콤은 ‘명성황후’ 제작에 사운을 걸고 12억 원이라는, 당시로는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부었다. 초연 흥행에 자신감을 얻어 2년 뒤인 1997년, 국내 최초로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에 진출했지만 반응은 그다지 좋지 못했던 모양이다. 미국과 영국의 관객들은 제국주의 희생물이 된 약소국의 눈물과 황후가 겪어야 했던 비운의 죽음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실제로 당시 현지 언론의 평가도 비슷했다고 한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공연 장면. 사진=에이콤
뮤지컬 ‘명성황후’의 공연 장면. 사진=에이콤



1995년 초연 때의 ‘명성황후’는 놀랍게도 윤석화였다. 당대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이긴 했지만, 클래시컬한 성악 스타일의 넘버를 소화하기에는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997년 해외 진출 버전에서는 김원정과 이태원이 ‘명성황후’를 맡게 된다. 이번 30주년 시즌의 ‘명성황후’는 김소현, 신영숙, 차지연이다. 김소현과 신영숙은 선배 세대의 바통을 이어받은 ‘2세대 명성황후’라 할 만한데, 2015년에 처음 ‘명성황후’를 맡아 어느덧 10년째다. ‘명성황후’에서 황후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손탁’ 역으로 뮤지컬에 데뷔한 신영숙이 ‘명성황후’ 역에 캐스팅되자 뮤지컬계의 대표적인 금의환향이라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차지연은 첫 합류지만, 명성황후를 다룬 또 다른 명작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에서 명성황후 역으로 유명했다.

‘30주년 버전’은 김소현 ‘명성황후’, 손준호 ‘고종’, 양준모 ‘홍계훈’, 이정열 ‘대원군’, 김도형 ‘미우라’로 봤다. ‘명성황후’는 초연 이래 꾸준히 작품을 수정, 업그레이드해 왔는데 이번 시즌도 마찬가지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고종 캐릭터일 것이다. 아버지 대원군과 황후 사이에 끼어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나약한 캐릭터로 비치던 이전 버전과 달리 꽤 당당한 인물로 거듭나 존재감을 드러냈다.

다들 알고 있듯 김소현, 손준호는 현실 부부다. 뮤지컬 배우끼리 결혼하는 경우는 적지 않지만, 같은 작품에 극중 부부 역할로 이들처럼 적극 출연하는 커플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동서양 작품을 막론하고 왕비 역할을 도맡아 ‘황후전문배우’로 불리는 김소현의 ‘명성황후’는 이전과 비교해 조금 해석이 달라진 것 같다. 왕의 아내로서, 세자의 어머니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국모로서, 개인적 야심을 지닌 정치가로서의 밸런스가 잘 맞아 있다. 서울대 음대에서도 최상위권 엘리트였던 김소현은 확실히 소리를 눈 뭉치듯 단단하게 만들어 객석 구석구석까지 날려 보내는 기술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백성들과 부르는 피날레 ‘백성이여 일어나라’의 벅차오르는 감동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완벽하게 동일한 것이다.

혼백이 된 명성황후가 백성들과 함께 “동녘 붉은 해,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를 부르며 한 발 한 발 객석을 향해 다가오는 이 장면의 감동은 어마어마하다. 개인적으로 한국 뮤지컬사를 통틀어 이만한 박력을 지닌 피날레는 본 기억이 없을 정도다. 좋아진 것도 있고, 사라져서 서운한 것도 있는, 첫사랑 같은 뮤지컬이자 영원한 현역. 100년 후에도 박물관에서 이 작품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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