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하늘 아래 홀로 만인지상, ‘뿌리’에 마음을 기대다

입력 2025. 02. 13   18:18
업데이트 2025. 02. 13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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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선원전, 궁궐 속 사당

선원=옥의 근원 ‘왕실의 뿌리’ 의미
태조 부친 환조부터 33함 영정 봉안
‘어진’은 초상화 넘어 그리움의 화신
일 있을 때마다 고하고 수시로 참배
90여 년 만에 돌아온 편액이 걸리면
다시 그 영적 공간 찾아 거닐고 싶어

 

창덕궁 선원전. 사진=국가유산청
창덕궁 선원전. 사진=국가유산청



선원전(璿源殿)은 창덕궁 인정전 서북쪽에 있다. 정면 9칸에 측면 4칸, 총 36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이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자리에 섰지만 원래는 경복궁 민속박물관 자리에 있던 건물이다. 선원전은 ‘옥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왕실의 뿌리’를 의미한다(『전주이씨대동종약원』). 왕들의 영정을 모신 신성한 공간으로서 궁궐 안 사당이었던 셈이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태어난 함경북도 영흥에 뒀다가 태조 사후 왕실에 들였다(『성호사설』). 제8대 임금 예종 때 환조(桓祖: 태조 부친) 이하 33함의 영정을 봉안했다(『국조보감』). 1444년 창건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1695년 영조가 창덕궁 별당 춘휘전을 고쳐 선원전으로 사용하면서 부활했다. 여기에는 숙종을 시작으로 후일 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어진(御眞)이 봉안됐다.

선원전은 1868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세워졌다. 고종은 선원전을 복구하며 창덕궁에 있던 어진들을 모두 이봉했다. 자기 직계가 아닌 철종의 어진만 천한전(天漢殿)으로 옮겼다(『임하필기』). 이후 고종 거취를 따라 어진도 함께 이동했다. 1897년 고종이 1년간 파천해 있던 정동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을 때는 선원전도 경복궁에서 옮겨왔다.

지금은 태평로가 돼 버린 곳에 있으나 1900년 화재로 건물과 어진이 모두 불타버렸다. 1년 후 경운궁 서북쪽에 복구하면서 지방에 있던 영정들을 모사해 다시 채웠다.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효명세자: 고종의 양부)·헌종까지 총 7점의 어진이 봉안됐다(『진전중건도감의궤』).

1908년 순종이 전국에 흩어져 있던 어진을 모두 이곳으로 옮겼다. 1921년 일제는 선원전을 창덕궁으로 다시 옮겨 지금에 이른다. 덕수궁의 구 선원전은 헐리고 그 터에는 조선저축은행 중역의 사택이 들어섰다(『문화재청포털』). 1932년 일제는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를 세우면서 경복궁 선원전 건물을 뜯어 썼다. 이때 편액이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11월 박문사가 화재로 전소됐다. 정문으로 쓴 경희궁 흥화문은 남았으나 선원전에서 떼어가 지은 고리(요사채)는 모두 불타버렸다(『서울 6백년』).

 

경복궁 선원전 편액. 사진=국가유산청
경복궁 선원전 편액. 사진=국가유산청



이 경복궁 선원전의 편액이 90여 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게임 회사 ‘라이엇게임즈’가 경매에 부치려는 소장자를 설득해 2024년 2월 매입한 덕이다. 구보는 편액 글씨를 접하고 단박에 매료됐다. 가로 3.12m에 세로 1.4m인 편액 글씨는 획 전체가 왼편 아래로 뻗어 내리는 해서체여서 활기가 느껴졌다. 서예가 이종선은 “천근 쇳덩이가 누르는 무게감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이조참판·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명필 서승보(1814~1877)의 글씨였다.

조선조는 선원전에서 해마다 속제(俗祭)를 지냈다. 종묘사직에 임금이 직접 올리는 대사(大祀), 하늘과 자연에 드리는 중사(中祀), 삼각산·목멱산·한강 등에 지내는 소사(小祀) 등과 함께 국가의 제사였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곤 했다.

 

동궐도 속 창덕궁 선원전(정중앙). 사진=국가유산청
동궐도 속 창덕궁 선원전(정중앙). 사진=국가유산청



가장 정성을 다한 이는 영조였다. 영조는 평소에도 자주 선원전을 찾곤 했다.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여 기로소(耆老所)로 원로들을 방문하기 전 들렀다. 경종비 선의태후가 집상전에서 발견한 선조의 옥대를 내려주자 그것을 차고 가서 분향한 기록도 보인다(『국조보감』, 영조 23년).

재위 37년이던 1761년 1월에는 왕세손(정조)을 대동하고 운종가에 멈춰 백성들과 대면례를 치른 후 선원전에 전배했다(『국조보감』). 부친 숙종의 기일에는 거처하던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와 밤을 새운 후 인시에 선원전에서 제사를 모셨다(『승정원일기』, 44년 6월 8일).

영조는 1748년 경종비 단의왕후를 모신 창덕궁 내 영휘전에도 선원전의 숙종 영정을 모사해 별도 봉안하고선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고하곤 했다(『임하필기』). 세손 정조에게도 1월이면 전배하도록 했다(『국조보감』, 영조 51년).

정조도 제위에 오른 후 조부를 본받아 자주 참배했다(『경모궁의궤』, 정조 1년 1월 1일 등). 그 아들 순조는 두 선왕처럼 전배를 통해 온화와 겸허를 다지며 “임금의 마음이 바로잡혀야 천하를 평화롭게 통치할 수 있다”는 선대들의 가르침을 좇았다(『국조보감』, 순조 3년).

선원전 업무는 인품이 있는 이를 승호관으로 삼아 6년 임기로 맡도록 했다(『경세유표』). 명종 때 이율곡이 ‘효행기(孝行記)’를 지어준 장인우가 선원전 참봉을 지낸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영조 대에는 여덟 왕릉의 참봉 가운데서 한 명을 뽑아 선원전 참봉으로 승진시켰다(『국조보감』, 영조 3년). 조선 중기 오원몽은 선원전 참봉을 지낸 후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받았다(『계곡선생집』).

이들의 주요 업무는 어진 관리였다. 낡아지면 모사 작업을 했다. 성종 때인 1472년 “화공 최경과 안귀생을 시켜 소헌왕후(세종대왕비), 세조, 예종의 어진을 모사해 선원전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국조보감』, 성종 3년). 중종 34년인 1539년에는 그동안 개경에 있던 정종과 정안왕후의 영정을 모셔 와 선원전에 봉안했다(『국조보감』).

영정은 생전에 그리기도 하고 사후에 그리기도 했다. 태조의 영정은 26축이나 있었다. 성종의 사후 영정은 1축이던 것을 고쳐 그려 9축에 이르렀다. 나머지도 모두 성종의 기준에 맞추다 보니 원본과 모사본이 뒤섞이게 돼 오래된 초본과 부건은 연고지에 따로 두기도 했다(『국조보감』, 명종 3년, 1548).

인조 때 태조의 어진이 있던 강릉 집경전(集慶殿)이 불타자 선원전에 있던 영정을 그대로 모사해 새로 지은 건물에 비치했다(『국조보감』, 인조 2년). 영조의 어진은 육상궁에도 3본이 봉안됐다. 육상궁이 생모 숙빈 최씨의 사묘인 점으로 미뤄 보면, 어진은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 그리움의 화신이 된다고 구보는 여긴다.

돌아온 선원전 편액 안료는 1868년 경복궁 재건 때 작성한 『중건도감의궤』에 기록한 당주홍·양록·연백 등의 재료들과 대부분 일치한 것으로 국립고궁박물관이 확인했다. 비록 어진들이 대부분 불타버려 내부를 채울 콘텐츠는 사라졌지만, 그 편액을 선원전에 걸면 구보는 다시 찾아가 볼 생각을 한다. 선왕들이 영정을 매개로 신격화됐던 영적 공간인 까닭이다. 그 공간에서 현군들은 선대에 매사를 고하고, 감사를 표하고, 묻고 자답하며 스스로 견제했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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