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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통일 독일 수도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목 놓아 불러

입력 2025. 02. 07   16:21
업데이트 2025. 02. 0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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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41. 2015년 유라시아친선특급 ⑥

폴란드 바르샤바서 ‘K팝 페스티벌’
아우슈비츠 수용소 못 가봐 아쉬워
마침내 종착지 베를린 무사히 도착
교민·독일인과 함께 2㎞ 거리 행진
분단·통일 상징 베를린 장벽 돌아봐
브란덴부르크문서 통일 염원 폐막 공연
파주 도라산역 해단식 대장정 마침표

 

브란덴부르크문까지 친선특급단원들이 통일을 기원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브란덴부르크문까지 친선특급단원들이 통일을 기원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를 떠나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한 날은 7월 29일. 당일 오후 5시 시내 팔라듐 극장에서 ‘2015 K팝 페스티벌’이 열렸다. 폴란드의 한류 팬 1500여 명을 비롯해 1800여 명이 참석했다. 커버댄스 경연에서는 눈이 호강했다. 다들 왜 그리 춤을 잘 추는지.

사실 여기보다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따로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하지만 편도로 4시간 이상 달려야 한다. 이미 늦었다. 계획된 일정을 뺄 수도 없고. 알았다면 모스크바에서 원하는 사람들과 따로 움직였다가 바르샤바 또는 독일 베를린에서 합류했을 텐데. 정보 부족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미리 알아보지 않은 내 탓이지.

저녁을 먹은 뒤 바르샤바 시내 탐방에 나섰다가 뜻밖의 건물을 만났다. 쇼팽의 심장이 안치돼 있다는 성십자가교회다. 쇼팽은 1849년 파리에서 숨졌다. 그의 누나가 유언을 이뤄 주기 위해 당국의 감시를 뚫고 치마에 심장을 숨겨 바르샤바로 옮겼다고 한다. 나라를 되찾으면 유해를 고국으로 옮겨 달라는 우리 독립지사들의 유언이 연상되는 일화다. 늦은 시간이어서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움만 남긴 채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에는 유대인 역사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옆에는 역사적 장면을 남긴 유명한 기념비가 있다. 게토봉기영웅기념비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당시 희생한 유대인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게토(ghetto)’는 소수 인종이나 민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대인 강제거주지역 등이 이에 해당한다.

1970년 12월 바르샤바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이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헌화하던 도중 연설문을 제쳐 놓은 채 한겨울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오랫동안 묵념하는 방식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사죄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 행동은 TV 중계와 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들의 보도로 널리 알려졌다. 전 세계 언론은 “그날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며 브란트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형제의 키스’. 모델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형제의 키스’. 모델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당시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비(게토봉기영웅기념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여기서 무릎을 꿇고 희생자를 추모했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당시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비(게토봉기영웅기념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여기서 무릎을 꿇고 희생자를 추모했다.

 

 

뜨거운 가슴으로 노래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7월 31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일대에서는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전날 오후 7시46분경 종착지 베를린에 도착해 숨을 가다듬은 일행은 이날 전승기념탑에서 브란덴부르크문까지 2㎞를 행진하며 통일 기원 노래를 목 놓아 불렀다. 여기에 교민과 일부 독일인까지 참여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독일 경찰도 도로 한편을 통제하면서 행진에 도움을 줬다. 특히 이날 행사는 브란덴부르크문 일원에서 벌어져 의미를 더했다.

브란덴부르크문이 무엇이던가. 독일의 전신이었던 프로이센 제국이 강대국의 위상을 자랑하기 위해 1791년 베를린 중심가인 파리저광장에 세운 개선문이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선 이 문을 통해서만 동서 베를린을 왕래할 수 있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의 관문 역할을 하며, 독일 분단과 동서 냉전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1989년 11월 10만여 명의 인파가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모인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 문은 다시 통일 독일의 상징이 됐다.

앞서 또 다른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을 둘러봤다. 우중충한 회색빛의 담장과 철조망. 장벽이 연상되는 이미지에 뭔가 절실함을 느낄 줄 알았다.

직접 본 장벽은 실망스러웠다. 현재 장벽은 일부만 남겨 두고 철거됐다. 남은 장벽도 세계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이 국가별로 구획을 나눠 그라피티로 장식했다. 분단의 아픔과 슬픔을 나타내는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었다. 풍자를 통한 전쟁의 잔악상과 비참함을 알려 주는 그림은 군데군데 눈에 띄었지만. 관리는 하되 방치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전승기념탑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를린. 멀리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인다.
전승기념탑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를린. 멀리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인다.

 

바르샤바에서 열린 K팝 페스티벌에 참가한 현지인들이 열광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바르샤바에서 열린 K팝 페스티벌에 참가한 현지인들이 열광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친선특급을 타고 베를린에 도착한 안중근 장군의 6촌 손녀 안현민(22·경북대 성악과) 씨와 고(故) 손기정 선수의 외손자 이준승(48)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행진에 앞서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안 장군의 사촌동생 안봉근 선생이 살던 집터를 찾아 눈길을 끌었다. 

친선특급의 피날레는 브란덴부르크문에서의 폐막 공연이 차지했다. 폐막식 행사로 진행된 음악회에는 소프라노 조수미, 피아니스트 백건우, 김덕수 사물놀이패, 지휘자 지중배, 옛 동독 출신 지휘자 위르겐 브룬스가 한반도 통일을 염원하는 내용의 공연을 펼쳤다.

또 한복 디자이너 권진순 씨가 이번 여정 동안 모은, 참가자들의 통일 염원을 적은 천조각 1000여 개를 이어 만든 대형 태극기가 무대 위로 오르며 대장정의 대미를 장식했다.

모든 행사가 끝난 뒤 일행은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며 회포를 풀었다. 이어 4명이 따로 모였다. 이들 중 3명은 공통점이 있었다. 동명이인이라는 것. 이름이 모두 이주영이었다. 국회의원과 코레일 관계자, 선발된 대학생의 성명이 모두 같았다. 나는 모자(ㅗ) 하나 더 쓴 비슷한 이름이이서 옵서버로 참석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도 했다. 비록 그 약속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채 미완으로 남았지만. 이주영 의원님, 혹시 이 글을 보시게 되면 그때처럼 자리 한번 마련할 생각은 없으신지?

다음 날인 8월 1일 친선특급단은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귀국했다. 그리고 17일 경기 파주시 도라산역에서 해단식을 하고 대장정의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폰토스 왕국을 점령한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고 기쁜 심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19박20일간 1만4400㎞의 여정을 달려온 감동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꿈꿨노라, 해냈노라, 그리고 (세계를) 알았노라”라고.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대통령실과 외교부도 다년간 출입했다.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대통령실과 외교부도 다년간 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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