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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선조들의 ‘굴욕’ 로마 장벽, 영국의 자랑이 되다

입력 2025. 02. 05   16:09
업데이트 2025. 02. 0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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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하드리아누스 방벽 - 로마판 ‘천리장성’ 

로마제국, 카이사르의 브리튼섬 첫 침공 이후 동남부 평정
하일랜드 원주민과 싸움서 큰 전력 손실 후 북진 멈춰
하드리아누스 황제, 서북단 경계선 구축해 점령지 방어
로마 기술 보여주는 방벽 세계문화유산으로 관광객 모아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현재 일부 모습. 출처=위키백과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현재 일부 모습. 출처=위키백과



19세기 ‘팍스 브리태니커’라는 표현처럼 세계 최대 식민제국의 후예답게 오늘날 영국은 인류사에 자랑할 만한 귀중한 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런던의 대영박물관이나 국립미술관 외에도 다양한 유형의 세계적 문화유산이 전국에 산재한 채 세계 각지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되고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문화유산으로 잉글랜드 북쪽 끝, 좀 더 정확하게는 현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경계 지대에 길게 뻗어 있는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을 꼽을 수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축조된 이 유적은 영국 원주민(켈트족·스코트족·픽트족)이 외부 침략자인 로마인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로 탄생했다.

즉, 기원전 5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래 간헐적으로 브리타니아를 침공한 로마군과 원주민 간 오랜 전쟁 과정에서 로마군이 북부 경계를 보호하고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해 건설한 총길이 약 120㎞(73마일)에 달하는 방어용 장성(長城) 구조물이었다.

우선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자. 카이사르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54) 때 감행한 대대적 원정으로 브리튼섬 동남부 장악에 성공한 로마 제국은 뒤이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96) 때 브리튼섬 속주 통치자로 임명된 아그리콜라 장군의 활약으로 오늘날 스코틀랜드 지역까지 진출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브리튼섬 원주민인 켈트족 및 픽트족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면서 섬 전체를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오늘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접경 부근에 긴 방벽을 구축해 이들의 저항과 침입을 막고자 했다.

122년 로마제국 최북단 영토인 브리타니아를 시찰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가 내린 명령에 따라 건설을 시작했기에 통상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불리고 있다. 당시 브리튼섬 주둔 로마군단은 8년(122~130)에 걸쳐 섬 동쪽 끝인 뉴캐슬에서 서쪽 끝인 칼라일까지 120㎞에 달하는 장성(長城)을 건설했다.

약 10년 후 후임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하드리아누스 방벽보다 북쪽(현재 글래스고~에든버러 라인)에 약 60㎞ 길이의 안토니누스 방벽을 세웠으나 곧 포기하고 하드리아누스 장성으로 철수해 이를 로마의 북방 경계선으로 삼았다.

왜, 그리고 어떻게 로마인은 당시에는 먼 땅 서쪽 끝으로 여겨진 브리튼섬까지 왔을까? 게다가 원정군으로서 어떻게 원주민의 격렬한 저항을 물리치고 브리튼섬을 통치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종국에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구축해야만 했을까?


로마군의 브리튼섬 최초 상륙을 묘사한 삽화.
로마군의 브리튼섬 최초 상륙을 묘사한 삽화.



로만 브리튼은 로마제국 전성기에 로마 통치를 받은 오늘날 잉글랜드, 웨일스, 그리고 스코틀랜드 남부 지역을 총괄해 일컫는 역사적 용어다. 당시에는 로마제국 서북쪽 국경 최북단으로 총 4개의 속주(屬州)로 이뤄져 있었다. 기원전 55년 로마군이 최초로 브리튼섬을 침공해 원주민 켈트족의 저항을 물리치고 43년에 가까스로 정복에 성공했다. 이후 무려 400년가량이나 브리튼섬을 통치한 로마제국은 4세기 말부터 빠르게 쇠락하다가 410년 최종적으로 브리튼섬에서 철수했다.

그렇다면 로마군은 어떻게 브리튼섬을 점령할 수 있었을까? 처음 브리튼을 침공한 인물은 역사상 잘 알려진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당시 브리튼섬은 로마인에게 거의 미지의 땅이었으나, 10여 년에 걸쳐 갈리아 지방(현재 프랑스 일대)을 평정한 카이사르는 갈리아인의 배후 지원 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의도 아래 기원전 55년(1차 브리타니아 원정), 54년(2차 브리타니아 원정) 두 차례에 걸쳐 브리튼섬을 침공했다. 원주민의 격렬한 저항으로 겨우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그쳤을 뿐 정복에는 성공하지 못한 채 전리품만 챙겨서 돌아왔다. 이것이 브리튼섬과 로마의 첫 만남으로, 이를 계기로 제한적이나마 로마 화폐가 통용되고 인적 교류도 이뤄졌다.

이후 100여 년 동안 평화가 이어지다가 43년 로마의 침략 본성이 되살아났다. 로마제국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무려 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브리튼섬을 침공했다. 당시 브리튼 원주민들은 과거와는 달리 로마제국에 호의적이어서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은 덕분에 로마군은 브리튼섬 남부 일대를 수월하게 정복해 그곳을 로마의 정식 속주로 삼고 3개 군단 규모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60년경 브리튼인들이 웨일스의 부디카 여왕을 중심으로 한바탕 반란을 일으킨 적은 있으나 이것이 진압된 이후로는 별다른 저항 없이 로마의 통치가 이어졌다.

브리튼섬 동남부를 평정한 로마군은 계속해서 섬 동북 방면으로 영토 확장 사업을 이어갔다. 78년 웨일스지방 정복에는 성공했으나, 이어서 시도한 칼레도니아(오늘날 스코틀랜드 지역) 점령 작전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하일랜드(스코틀랜드 고지대 지방) 원주민 픽트족과의 싸움에서 상당한 인력 손실을 입었다. 결국 로마군은 더 이상의 북진(北進) 시도를 단념한 채 브리튼섬 북부에 일종의 ‘영구적’ 경계선을 설치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황제 하드리아누스 동상.
황제 하드리아누스 동상.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제14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브리튼섬 방문을 계기로 대역사(大役事)에 착수했다. 황제는 영국 북부에서 더는 로마군의 영토 확장을 원하지 않았으며, 북부 지역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그는 제국의 국경을 명확히 구분하고, 이미 점령한 지역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긴 국경 방벽으로 손꼽힌 ‘하드리아누스 장성’이었다. 사실상 고대 로마군의 성곽 건설은 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발달한 기술로 로마제국 확장과 지배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마의 성곽은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지역 통제, 군대 배치, 그리고 로마제국의 상징적 존재감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단순히 방어용 성벽 용도를 넘어 로마제국의 권위와 존재감을 상징하는 구조물이었다. 특히 방벽을 연해서 여러 군사 기지와 요새들이 설치됐는데, 이런 군사 기지는 단순히 방어적 역할에 머물지만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은 교역 거점이자 문화의 교차점 역할을 했다. 성벽을 경계로 로마 문화와 북부 원주민 부족의 문화 사이에 상호 교류가 이뤄졌다. 성벽 근처에는 로마의 군사 기지를 중심으로 교역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상업 중심지가 생겨나기도 했다. 장성을 따라 여행 및 이동하는 상인과 병사들은 물품을 교류하며 경제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오늘날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로마제국의 건축과 군사 기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다. 원래는 로마 점령군이 방어와 통치, 그리고 로마제국의 힘과 존재감을 영국인 선조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축조한 것이지만, 현재는 영국이 자랑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처럼 그 명성에 걸맞게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고대 로마제국의 북부 국경을 지키기 위한 방어선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군사·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정복민과 피정복민 사이에 문화적 교류와 상호작용의 공간으로도 한몫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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