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스타를 만나다 - 캔디스
“뭘 좋아할지 몰라 다 갖고 왔어”
16곡 꽉 채운 첫 정규앨범 발표
곡 아이디어부터 진행까지 주도
K팝 공식 대신 장르의 규칙 충실
10대의 상상·20대의 현실 적응
여유로운 그루브 위에 얹어 전달
생소한 ‘K팝 그룹’이라는 표현은 모순처럼 느껴진다. 미디어의 관심이 쏟아지는 가운데 가장 먼저 유명해지고 인기를 누리는 K팝이 어떻게 낯설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소개하는 4인조 걸그룹 캔디스는 정말로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도통 뭔가가 나오지 않는 신인 그룹이다. 멤버들의 정보도, 그룹의 활동내역도 정리돼 있지 않다. 매일 새로 나오는 음악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었다면 이들을 아주 늦게, 혹은 아예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캔디스는 우리가 어렴풋이 갖고 있는 K팝의 모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다. 음악부터 살펴보자. 지난달 14일 발표한 첫 정규앨범 ‘플레이그라운드’에는 무려 16곡이 수록돼 있다. 요즘은 10곡 이상 담긴 정규앨범이 드물다. 노래 하나를 ‘싱글앨범’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포장하고, 6~7곡이 담긴 노래를 정규앨범으로 부르는 오늘날 K팝 시장에선 더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다. 자체 제작한 라이브 콘텐츠에서 멤버들은 이 16곡의 노래를 편집 없는 원테이크로, 마이크도 없이 4명이서 호흡을 맞춰 40분 내내 노래한다. 범상치 않다.
캔디스의 음악은 팀의 맏언니 헬로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이제는 K팝 그룹이나 솔로 음악가가 곡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게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곡의 아이디어를 스스로 생각하고 완전 체화한 결과물을 내놓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앨범을 소개하는 글에 담긴 자세한 곡 설명은 고심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내용이다.
보통 이런 ‘자체 제작’ K팝에는 베테랑 작곡가 혹은 프로듀서, 음악가가 함께 끝자막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플레이그라운드’는 그렇지 않다. 히트곡 ‘크리스천(CHRISTIAN)’의 주인공 지올 팍과 작업하는 기타리스트 김한빈·프로듀서 보이콜드, 작곡가 빅싼초·작곡팀 플로스나인이 있긴 하다. 하지만 앨범을 듣다 보면 곡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들은 외부 참여진이 아닌 헬로를 주축으로 하는 캔디스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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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스의 ‘플레이그라운드’에는 일관된 지향이 존재한다. 1990년대 해외에서 인기를 누렸던 R&B·소울·힙합 장르 걸그룹의 음악이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TLC다. 티보즈, 레프트아이, 칠리의 이름을 딴 3인조 걸그룹 TLC는 프로듀서 베이비페이스, 댈러스 오스틴, 오거나이즈드 노이즈와 함께 1990년대 세계 시장을 정복했다.
여유로운 그루브의 소울 위에서 자유분방한 주제로 화음을 맞추는 캔디스의 음악이 어디서 힌트를 얻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펑크 베이스 리듬 위 자유롭게 춤을 추는 ‘플레이그라운드’는 TLC의 데뷔 싱글 ‘Ain’t 2 Proud 2 Beg’가 감지된다. TLC의 독특한 콘셉트와 노래에 다수 참여했던 멤버 레프트아이와 캔디스의 헬로가 대응하는 점도 흥미롭다. 캔디스가 헬로와 나인의 2인조였던 시절 싱글 ‘BF’를 들어 보면 그들의 ‘최애’ 장르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 TLC 외에도 엔보그, 아웃캐스트, SWV, 빌랄 등 1990년대 R&B·네오 소울 장르 음악이 캔디스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사실 이 시대의 미감과 음악은 몇 년 전 K팝 시장에 대대적인 충격을 안긴 바 있다. ‘어텐션(Attention)’으로 데뷔했던 뉴진스가 주인공이었다. 프로듀서 250과 프랭크가 음악을 맡고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가 대상화 없는 여성의 시선으로 완성한 뉴진스의 미감은 지금까지 K팝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뉴진스의 성공에서 영향을 받은 수많은 걸그룹처럼 캔디스 역시 복고와 여성의 문법을 공유한다. 차별점은 타인에 의한 피상적 채택이 아닌, 헬로와 멤버들의 취향을 바탕으로 직접 제작한 ‘수제’ 음악이라는 데 있다.
캔디스의 음악은 K팝보다 장르의 규칙에 충실하다. 벌스, 프리코러스, 코러스, 브리지의 구성이나 후렴에 한 방을 걸기 위해 등장하는 고음 파트 등이 없다. 앨범의 많은 곡이 ‘플레이그라운드’처럼 랩과 베이스 리프 기반의 후렴을 들려준다. 이는 노래 단위 단편적인 감상보다 전체 앨범을 순서대로 재생해 그룹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즉각적인 몰입의 어려움을 부른다는 점에서 장점이자 단점이긴 하나 ‘BF’를 제외하면 거의 등장하지 않는 한국어 가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캔디스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걸까. 헬로의 소개를 따라 흐르는 앨범은 10대의 상상과 20대의 현실 적응 과정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다. K팝이 흔히 사용하는 과장과 비유 대신 K팝 아이돌이란 형태로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의 소회, 곡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의 즐거움,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플레이그라운드’와 ‘:)’ ‘위드 아웃(Weed Out)’처럼 밝고 장난스러운 곡이 재미있지만, 그 아래에는 ‘루인드(Ruined)’와 ‘페이스(Faith)’처럼 불안과 우울을 고백하는 깊은 마음이 있다. 몇 년간의 연습생 생활과 기획사 이전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데뷔한 헬로와 나인의 경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서사다. 최근 방탄소년단(BTS) RM, 블랙핑크 로제 등 엄격하고 잔인한 K팝의 시스템 한가운데서 그 자체를 창작소재로 삼아 고백하는 결과물이 많은 주목을 받는 가운데 캔디스의 음악 역시 새로운 가능성을 띠고 있다.
캔디스는 ‘뭘 좋아할지 몰라 다 갖고 왔어’라고 ‘플레이그라운드’ 앨범을 소개한다. 단단히 준비된 자신감이 먼저 읽힌다. 동시에 대중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소수가 있다고 해도 이를 그룹의 미래로 연결 지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K팝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도 읽힌다.
K팝이란 음악과 음악을 만드는 제작 시스템은 익숙하고 유명한 만큼 과도한 호평과 오해, 혹평이 공존하는 복잡한 생태계다. 최근 고도로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K팝이 과연 음악을 다루는 게 맞는지, 종사자들이 이에 관한 자각을 갖추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 때도 많다. 자본의 논리, 시장의 수요, 평단의 관성은 이제 너무 답답하다. 명료하게도 대답과 해석은 음악이어야 한다. 풍부한 재능과 가능성으로 즐거운 캔디스의 ‘플레이그라운드’처럼 말이다. 사진=SXTYDG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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