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경순왕릉, 유일한 경주 바깥의 신라왕릉
천년 왕조 국운 다하고 민심 고려에
“백성의 간과 뇌가 길에 떨어지는 일,
내가 할 수 없어” 왕건에 귀부 택해
고려에 43년 봉사, 81세에 사망하자
개경 살던 신라인들 경주 운구 시도
수도 빌까 우려한 경종이 막아 세워
아들 ‘마의태자’ 가슴에 묻었겠지만
경순왕 삶을 비루하다 할 수 있을까
|
1월 중순 눈에 덮여 온통 하얘진 임진강을 따라가다 연천 고랑포에서 ‘경순왕릉’ 표지판을 보고 핸들을 꺾었다. 신라왕의 능이 이런 북쪽에 있다는 게 조금 낯설었던 까닭이다. 37번 국도에서 꼬부라져 찾아 들어가는 입구에 경순왕의 세자 김일과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 등의 신위를 모신 경주 김씨의 영단이 보인다.
경순왕릉은 비각과 재실을 갖췄으나 제왕의 능치고는 소박했다. 임진왜란 이후 오랫동안 잊힌 상태로 있다가 영조 23년이던 1747년 재정비됐다. 무심한 세월만이 1000년을 흘러 왕릉 주위는 온통 지뢰밭이었다. 2㎞ 북방이 군사분계선인 탓도 있어 보인다. 설 연휴에 눈이 녹지 않은 길을 들어서는 우리의 방문이 의외였던지 나이 지긋한 문화해설사가 얼굴을 내밀고 말을 건넨다. 그에게서 한 국왕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경순왕은 936년 1월 13일 신라를 고려 태조 왕건에게 넘기고 개경 근처에서 살다 사후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에 묻혔다. 욕된 삶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경순왕은 신라의 국운이 이미 다했고, 민심이 이미 신흥 고려 쪽으로 기운 것을 간파했다. 욕심을 내어 전쟁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고통을 겪을 백성의 삶을 고려해 왕건을 임해전으로 초치해 귀부의 뜻을 전했다. 평화를 택한 것이다.
반대하는 왕자에게 말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커서 더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무고한 백성들의 간과 뇌가 길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삼국유사』, ‘기이’).”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삼국사기』에서 경순왕의 결정을 존중했다. “경순왕이 태조께 귀순한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때 만약 태조의 군사에게 항거했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을 멸망시키고 무고한 백성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
|
10세기 한반도는 어지러운 시기였다. 927년 선왕(先王) 경애왕이 포석정 나들이 중 후백제군의 기습을 당해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김부가 제56대 제위에 올라 8년간 집권했으나 천하가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독립선언으로 3분돼 수습 불능이었다.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황이었다. 신라의 멸망은 후대 왕들이 교훈으로 삼았다. 조선 21대 국왕 영조도 그러했다.
“상번 정우량이 아뢰기를, ‘신라가 처음에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잘 돌봤으므로 왕업(王業)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후대 임금에 이르러서는 하늘을 공경하지도, 백성을 잘 돌보지도 못했기에 패망함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임금의 흥망이 어찌 이 두 가지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각별하게 유의해 교훈으로 삼는다면 어찌 치화(治化)에 큰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절실하다. 각별하게 유의하겠다’했다. 이어서 조적명이 아뢰기를, 상번이 아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잘 돌본다’는 말이 좋습니다. 나라가 흥성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니 경천휼민(敬天恤民)이란 네 글자는 참으로 임금의 사자부(四字符)입니다. 각별히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바가 좋다. 유념하겠다’(『승정원일기』 영조 5년 9월 27일)”라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영조는 경순왕의 사당이던 경주의 동천묘(숭혜전)에 기실비(記實碑) 비문을 지어 하사했다(『정조실록』 4년 2월 4일). 경순왕의 사례가 후대 왕들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 역할을 한 것이다.
속마음이야 알 길 없지만 기록으로만 보면, 경순왕은 고려에 귀부한 후 남은 일생을 편안하게 보냈다. 평화를 선택했던 연유로 스트레스가 크지는 않았던지 전국 명승지를 여행 다니며 수를 누렸다. 단지 ‘마로 된 옷을 입었다’ 해서 ‘마의(麻衣)태자’로 부른 왕자 일(鎰)이 토로한 마지막 말은 분명 아버지의 마음속에 가눌 길 없는 슬픔으로 자리 잡았을 터였다.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마땅히 충신 및 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해 힘을 다해 끝까지 스스로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어찌 1000년이나 된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다른 사람에게 준단 말입니까?” 부왕이 항복하자 왕자는 통곡하고 곧장 개골산(皆骨山·금강산)으로 들어가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은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새 아내로 맞고 왕의 작위를 받아 경주 사심관을 지냈다. 그에 대한 고려조의 평가도 우호적이었다.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하고 문장은 땅을 진동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육도삼략(六韜三略·병서)은 가슴속에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지략)은 손바닥 위에서 움직였다(『삼국유사』).” 김부는 고려조에 43년간 봉사한 후 978년 향년 81세로 사망했다.
왕이 몰하자 “더는 개경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해 당시 개경으로 이주해 살던 신라인 1만여 명이 경주로 운구를 시도하자, 수도가 텅텅 비게 되는 것을 우려한 고려 5대 왕 경종이 “왕은 개경 백리 바깥에 묘를 쓸 수 없다”는 칙령을 내리면서 운구행렬은 개경 남동쪽 70리 지점인 현재의 연천군 장남면에서 멈춰 서야 했다. 당시 장례 행렬은 “30리가 하얗다”고 표현됐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전한다.
이런 연유로 경순왕의 능은 신라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 바깥에 자리 잡게 됐다. 묘는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너무 소박해 후손들의 상소로 조선조 영조대에 이르러 그나마 현재 모습으로 확분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신도비에 관한 스토리다. 그의 일대기를 적은 신도비는 오랫동안 소실된 상태였다가 1970년대 이곳 고랑포중학교 교장이 고랑포구 강가에서 주민들이 빨래판으로 쓰던 돌에 주목해 전문가에게 고증을 맡긴 결과 “1000년 전의 돌이며 당시 이곳에 있었다면 사라진 경순왕 신도비가 틀림없다”는 판단을 받으면서 기적적으로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신도비에 남은 11자의 글자가 탁본으로 보존되고 있다.
경순왕 묘에서 구보는 생각에 잠긴다. 이 땅의 왕으로서는 예외적인 일생을 살다 간 그의 삶은 비루하기만 했을까? 권좌와 전쟁 대신 백성의 안위를 선택해 기득권을 내려놓은 ‘비운의 왕’ 김부의 삶에 대한 재조명이 있음 직하다, 여긴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