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골목 속으로
④ 남미의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
폭 220㎞ 라플라타강 하구
비옥한 평야 번성했던 한때
32차선 도로 위 오벨리스크
당시의 영화 보여주듯 웅장
스페인·이탈리아 이주민들
유입 통로였던 마을 라보카
알록달록 색감 눈길 끌지만
강도 활개 주변 빈민가 조심
세계서 손꼽히는 아름다움
궁전 같은 서점 엘 아테네오
책과 예술 공존 핫플레이스
한국인들에겐 ‘아아의 성지’
피자·파스타·아이스크림…
골목마다 인정받는 맛집들
값싸지만 맛있는 스테이크
말벡 와인과 페어링도 최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를 걷다 보면 여기가 유럽인지, 남미인지 도통 헷갈릴 정도다. 거리 여기저기서 선남선녀가 탱고를 추고, 하늘색 줄무늬의 아르헨티나 국기와 축구복 역시 곳곳에서 펄럭이며 여행자를 반긴다. 한때 세계에서 7번째로 잘살았던 나라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그래서 보여 줄 게 참 많다. 16차선 도로는 그 폭만 무려 140m. 길을 건너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한마디로 웅장한 도시 그 자체다. 그뿐인가? 이탈리아 이주민이 연 식당들은 이탈리아보다 더 맛있다. 파스타, 와인, 아이스크림, 스테이크의 천국이다. 여행자들이 원하는 모든 걸 가진 팔방미인의 도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이름의 유래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는 좋은 공기라는 뜻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기가 그렇게 좋나? 아니다. 이 호칭은 가톨릭 종교에서 유래됐다. 가톨릭에선 성모를 부르는 방식이 여럿 있다. ‘로사리오의 성모(Nuestra Senora del Rosario)’라든지 ‘파티마의 성모(Our Lady of Fatima)’라든지. 이탈리아 사르데냐섬의 한 성당에서 성모 마리아를 ‘좋은 바람의 성모(Santa Maria del Buen Aire)’라고 불렀다. 항해자들의 안전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표현이었다. 항구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더없이 적절한 이름이었다.
이 도시는 라플라타강 하구에 자리 잡고 있다. 라플라타강은 세계에서 강폭이 가장 넓은 강으로, 최대 폭이 무려 220㎞나 된다. 220㎞의 폭이라니? 상상으로도 그려지지 않는 어마어마한 너비다. 강 주변은 비옥한 평야로, 라플라타강의 물을 쭉쭉 빨아 먹고 자란 초원과 그 풀을 먹고사는 소들의 천국이다. 왜 아르헨티나가 세계적인 곡창지대냐고? 말도 안 되는 거대한 강이 유유히 흐르며 동식물을 먹여 살리고 있어서다.
유럽의 흔적으로 가득한 도시
1492년부터 20세기 초까지 1800만 명 정도의 유럽인이 남미로 이주해 왔다. 그중 아르헨티나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인이 주를 이뤘고, 규모도 가장 컸다. 자연스럽게 유럽 문화가 아르헨티나에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아르헨티나 경기가 좋지 않지만, 한때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었다. 특히 낙농업이 발달했는데 소고기, 밀, 옥수수가 유럽에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문에 유럽인들이 앞다퉈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67.5m 높이의 오벨리스크. 모양은 단조롭기 그지없으나 좌우 16차로에 우뚝 선 모습은 세상의 중심처럼 당당하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넓은 도로이기도 했던 이곳은 아르헨티나가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증명한다.
자동차가 얼마나 늘어나든 도로가 막혀선 안 된다. 그 자신감과 배짱이 지금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만들었다. 거인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로를 건너는 건 쉽지 않다. 140m를 다 건너기 전에 신호가 바뀌므로 뛰지 않으면 중간에서 다시 신호를 기다려야 할 정도다.
라보카 지구, 아름다움과 비극의 공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라보카(La Boca) 지구’다. 알록달록한 색감에 여행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이들 감성의 천진난만한 색들은 사실 슬픈 사연이 있다. 인근 항구에서 쓰다가 남은 페인트를 구해 와 칠했기 때문에 여러 색이 뒤섞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보카의 ‘보카’는 스페인어로 입 혹은 입구라는 뜻이다. 수많은 이민자가 라보카 항구로 들어와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 이탈리아 제노바 지역의 하층민이 주로 살았다. 1980년대 인기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의 주인공 마르코 역시 제노바 출신. 마르코는 돈을 벌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간 엄마와 소식이 끊기자 홀로 먼 여행을 떠난다. 병으로 몸져누워 있는 엄마와 재회한 마르코는 엄마와 같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다짐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현실은 만화가 아니다. 여전히 라보카 주위는 빈민가다. 이 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도 강도의 먹잇감이 된다. 실제로 일행도 라보카 인근에서 강도를 만나 큰돈을 잃었다. 아름다움과 삶의 비극이 공존하는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그 정점이 라보카가 아닐까?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애틋하다.
엘 아테네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 그랜드 스플렌디드(El Ateneo Grand Splendid)’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통한다. 처음 봤을 때가 18년 전인데, 궁전에 온 줄 알았다. 영화 ‘미녀와 야수’ 촬영장에 온 기분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건물이 서점이라 더욱 놀라웠다.
원래 용도는 공연장으로, 1919년 개장한 이후로 오페라·연극 등이 상연됐다. 웅장한 돔 천장, 화려한 샹들리에, 발코니 좌석 등 건축적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며 남미 최초의 유성영화가 상영됐던 곳이기도 하다.
2000년 건축가 페르난도 만소네가 이곳을 서점으로 개조하면서 극장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 냈다. 이곳은 영국의 가디언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2번째로 아름다운 서점으로, 책과 예술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한국인에겐 아이스 아메리카노 성지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맛있는 도시는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장 큰 즐거움은 뭐니 뭐니 해도 음식이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스테이크는 아르헨티나 스테이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미국 뉴욕에서 제일 유명한 스테이크 맛집에서 먹었던 스테이크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동네 맛집에서 맛본 스테이크가 개인적으로 훨씬 맛있었다. 맛이야 주관적이라고 해도 가격은 객관적이다. 뉴욕의 5분의 1 가격이면 최고 수준의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다.
이탈리아인이 대거 이주해 왔기에 피자·파스타·아이스크림 맛집도 골목마다 있는 수준. 굳이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동네에서 인정받은 맛집이면 충분하고 훌륭하다.
아르헨티나는 와인도 유명하다. 프랑스인이 말벡이라는 포도 품종을 들여왔으나 프랑스보다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높은 고도와 건조한 기후에 더 잘 맞았다. 지금은 전 세계 말벡 와인의 75%가 아르헨티나에서 생산된다. 체리·자두 등 검붉은 과일 향이 특징이고, 스테이크와의 합이 특히 좋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비싸 망설였던 맛집 투어는 아르헨티나에서 하면 된다. 게다가 맛까지 좋으니 1일 1스테이크를 꼭 실천할 것. 먹을수록 남는 장사.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서글픈 현실
아르헨티나는 경기가 좋지 않다. 물가가 치솟고, 돈의 가치는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월급은 제자리인데,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뛴다. 고기 값이 몇 달 만에 배로 뛰는 게 아르헨티나에선 일상이 됐다. 멀쩡한 옷차림의 사람들도 쓰레기통을 뒤진다. 한때 가장 부유했던 나라의 수도가 이렇게 전락한 이유는 정부의 무능, 수출 품목의 다변화 실패, 정치적 불안정 등 여러 요인의 결과다. 원래부터 가난했던 나라가 아니어서 그 모습은 더 충격적이고 서글프다.
불안한 치안, 극단적인 빈부 격차에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여전히 아름답다. 울창한 가로수와 어디에나 있는 푸른 공원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메마른 현실을 잊게 한다. 먹고살기 힘들다면서 윤기가 반지르르한 개들이 그 어느 도시보다 많이 보인다. 좋은 개가 많다는 건, 좋은 개 주인이 많다는 뜻도 된다. 동물을 끔찍이 아끼는 좋은 사람들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예전의 여유와 부를 되찾길 바란다. 그래야 여행자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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