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그림 속 사계 모네의 눈으로 전하는 시린 겨울의 풍경
아침엔 푸르스름, 정오엔 햇빛샤워…
인상주의 화풍 주도한 클로드 모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움직임’ 주목
한 소재로 다양한 빛깔 시리즈 선봬
흐릿하고 습기 가득한 ‘모네의 겨울’
다채로운 ‘눈의 色’ 찾아내는 재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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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어느 한낮, 소복하게 쌓인 눈이 얼어붙은 땅과 세상의 소리까지 덮은 듯 마을은 고요에 잠겨 있다. 인적 없는 설경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낮은 문틀에 올라 고개를 돌린다. 울타리 너머 오른편에는 눈의 무게를 이기고 서 있는 서너 그루의 나무와 박공지붕의 건물이 있다. 그림 왼편에는 내리막길이 펼쳐지듯 가로수는 화면 아래로 점점 사라진다. 그 끝이 너른 평지인지, 바다인지 끝없이 이어지고 지평선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하늘과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클로드 모네가 1869년 그린 ‘까마귀(Magpie)’다. 작품은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방의 작은 마을 에트르타 풍경을 담았다. 그림으로 큰 수입이 없었던 시기에 모네는 후원자가 마련해 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모네는 시골 마을에서 후에 아내가 된 연인과 갓 태어난 아들을 돌보며 안정적인 환경에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 흐린 겨울날의 풍경화가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네는 두말할 것도 없이 19세기 인상주의를 이끌었던 작가다. 당시 소위 아카데미라고 하는 보수적인 그림에는 명확한 공식이 있었다. 나무와 건물 위치는 물론 하늘과 구름의 표현 방식이나 어떤 색을 칠해야 하는지마저 정해져 있었다. 화가가 관찰한 것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스승의 가르침이 더 중요했다. 실제로 바깥 풍경을 보지 않고도 매뉴얼만 잘 따른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모네와 뜻을 모은 화가들은 보수적인 화단에 반기를 들었다. 모네와 동료들은 당시 개발된 휴대용 이젤과 금속 튜브에 담긴 물감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기 눈으로 직접 관찰한 ‘정직한’ 자연을 캔버스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1분만 지나도 바뀌는 해의 위치, 그림자 길이, 바람 상태, 공기의 변화를 잡아두기 위해 화가들은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자 했다. 견고하고 완성도가 높은 아카데미풍 작품에 비해 인상주의 작품은 자연의 한순간을 빠르고 짧은 붓놀림으로 담는다. 회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인상주의 작품에 대해 평가는 혹독했다. 한 평론가가 작품이 눈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상(impression)’에 불과하다고 한 비아냥에서 ‘인상주의(imperssionism)’라고 불리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와 계절의 찰나를 눈으로 포착하듯 ‘찍은’ 모네의 실험은 가속됐다. 그 절정에 있는 작품이 같은 물체를 25점 이상 그린 ‘건초더미’다. 초가지붕 모양의 건초더미는 당시 프랑스 시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소재였다. 모네는 건초더미 자체보다 새벽부터 일몰까지 빛의 양과 날씨, 온도와 계절 변화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건초더미에 관심을 가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른 아침의 건초더미는 미처 떠오르지 못한 태양 빛이 도달하지 않은 푸르스름한 색을 띤다. 대낮의 건초더미는 눈부신 직사광선에 곡식의 낱알이 흩어지듯, 형태는 부서지고 빛깔은 찬란하다. 그리고자 한 대상이 시간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모네는 하나의 소재를 다른 빛깔로 그린 시리즈를 여럿 선보였다.
‘까마귀’는 모네의 인상주의 실험에 신호탄을 쏜 작품이다. 인상주의 미술이 활발했던 1865년부터 약 30년 동안 강추위가 서유럽을 강타하면서 눈보라와 폭설이 이어졌다. 야외 사생을 중요하게 여겼던 모네는 혹독한 추위에 맞서며 밖으로 나갔다. 이 시기에 모네를 만난 한 기자는 이렇게 남겼다. “며칠 동안 눈이 계속 내리고 바위가 쪼개질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장갑을 낀 손으로 이젤을 들고 코트를 세 겹 입은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반쯤 얼어 있었지요. 바로 눈을 연구하던 모네였습니다.”
인상주의 작품은 대개 봄과 여름의 따사로운 햇볕 아래 만물이 생동하고, 온기가 가득한 분위기를 지닌다. 그러나 의외로 모네와 동료들은 ‘겨울의 인상주의자’라는 전시가 따로 열릴 정도로 설국 풍경을 많이 남겼다. 흰 눈으로 뒤덮인 시골은 색채의 향연을 펼친 인상주의자에게 자칫 단조로운 풍경일 수 있다. 하지만 실은 얼마나 흰색이 다양한 빛을 발하는지, 색채의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무대이기도 했다. 140점이 넘게 남겨진 모네의 겨울 풍경화 중 ‘까마귀’는 단연 가장 큰 사이즈의 작품이다. 겨울을 그린 다른 작가의 청명하고 날카로운 표현과 달리 모네의 겨울은 흐릿하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느낌이다.
무엇보다 인상주의자로서 모네의 묘수는 그림자 표현에서 두드러진다. 왼쪽 위 어느 지점에서 태양 빛이 내려와 그림을 횡단하는 울타리의 그림자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울타리 그림자 아래로는 키 큰 나무의 그림자가 수직축을 만들며 그림 균형을 잡아준다. ‘까마귀’에서 그림자만 도려내어 보면 그림자는 파란빛이 감도는 옅은 보라색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림자를 검은색이나 짙은 회색으로 그리는 기존 그림 공식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림자 색면도 균일하지 않고, 빛이 들어오는 양에 따라 아래로 갈수록 보라색이 짙어진다. ‘눈은 흰색’이라는 공식을 깨듯 작품을 확대해 보면 장밋빛에 가까운 옅은 붉은 기가 군데군데 보인다. 이 그림 이후 모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눈으로 본 자연의 색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그렸다. 모네는 배운 대로가 아닌 자기 눈으로 본 풍경을 그렸던 것이다.
모네의 실험이 지나치게 혁신적이었던 탓일까? 프랑스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미술제전인 살롱에서 작품 ‘까마귀’는 거절당했다. “너무 평범하고 지나치게 거칠다”는 이유에서였다. 살롱이 택한 매끈하고 공들인 그림에 비해 모네의 그림은 정성이 덜 들어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상주의 미술의 단초를 마련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4년 프랑스 근대미술의 성지인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됐다. 시린 겨울의 감각을 새로운 색채 실험으로 선보인 모네의 ‘까마귀’는 지금까지 오르세미술관을 대표하는 그림이자, 관객이 사랑하는 그림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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