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정덕현의 페르소나

여걸, 판타지는 디테일에 있다

입력 2025. 01. 22   17:05
업데이트 2025. 01. 22   17:22
0 댓글

정덕현의 페르소나  
호방 본색 김혜수, ‘트리거’ 사이다 캐릭터의 귀환

총구 앞에서도 “쏴 봐”
탐사보도팀장 ‘오소룡’
현시대의 ‘영웅호걸상’

청순·코믹·카리스마…
다양한 매력 발산하며
대체불가 배우로 입지

역할마다 호방함 더해

굵직한 목표 향하지만
세심함으로 연기 완성

‘트리거’
‘트리거’


“야 인마! 넌 사내새끼가 기집X 밑에서 일하냐, 쪽팔리게!”

다짜고짜 총부터 들이대는 사이비 종교 교주가 탐사보도 프로그램 ‘트리거’의 팀장 오소룡(김혜수)이 여자인 걸 알고는 남자 팀원에게 영 감수성 떨어지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던진다. 그러자 오소룡이 여유 있게 웃으며 말한다. “제가 또 보통 기집X은 아니거든요.”

디즈니+ 드라마 ‘트리거’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이 장면은 오소룡이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물의 기대감을 높여 놓는다. 그건 진실을 알리는 탐사보도를 위해선 물불 가리지 않는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역할을 연기하는 김혜수에게 거는 기대이기도 하다.

똑같은 역할을 해도 김혜수가 하면 어딘가 다르다. 대체불가의 호방함이 캐릭터에 묻어난다. 그 인물이 시원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라면, 청량감과 폭발력은 더 강력해진다.


영화 '첫사랑'
영화 '첫사랑'

 

영화 '타짜'
영화 '타짜'


실제로 ‘트리거’의 첫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사이비 종교단체와의 일전이 그렇다. 보도를 위해 패러글라이딩으로 높은 사이비 종교집단의 벽을 넘어 들어가는 장면은 현실성이 없지만, 김혜수가 연기하니 그럴듯해 보인다.

장전된 총구 앞에서도 “쏴 봐”라고 외치며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이미 설득당했다. 그러니 사실상 진실 보도의 판타지적 욕망을 담은 ‘트리거’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은 오소룡이란 인물을 입은 김혜수를 보자마자 마음을 정하게 된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김혜수 특유의 이 호방한 느낌은 처음부터 생겨난 게 아니다. 어릴 적 태권도 유단자로 사범님 앞에서 “태권!” 하고 거수경례를 했던 시절부터 내면에 장전돼 있었던 게 분명하다.

열여섯의 나이에 광고모델로 주목받아 영화 ‘깜보’로 연기자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 어린 나이에 성인 연기까지 맡는 대범함이 그냥 생겼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김혜수가 처음 대중적인 배우로 자리매김한 건 이런 호방함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청순 가련한 역할을 통해서였다. 바로 이명세 감독의 영화 ‘첫사랑’ 박영신이라는 인물이다. 이 역할로 김혜수는 최연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그런 이미지가 김혜수는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서 젊은 미시족 연기로 변신을 시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김혜수는 ‘섹시 이미지’로 주로 소비되는 성장통을 겪었다.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던 영화 ‘얼굴 없는 미녀’(2004)가 대표적인 사례다.


드라마 '슈룹'
드라마 '슈룹'

 

 

김혜수 본연의 호방함은 ‘타짜’(2006)로 발현돼 대중을 매료시키기 시작한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유행어까지 만든 김혜수는 이때부터 맡는 역할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더함으로써 대체불가 배우로 우뚝 서게 된다. 

드라마 ‘직장의 신’(2013)에선 김혜수가 가진 시원시원한 여걸의 면모와 코믹함·카리스마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모습을 ‘미스 김’이란 캐릭터로 보여 줬다. 영화 ‘차이나타운’(2015)에서는 사채업자 대모로, 조직 보스 역할을 김혜수만의 누아르적 카리스마를 더해 꺼내 놨다. 드라마 ‘시그널’(2016)에선 차수현이란 인물의 과거 젊은 시절 신출내기 형사, 현재의 베테랑 형사팀장을 오가는 연기를 선보여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이처럼 김혜수는 청순함부터 코믹함과 관능미, 카리스마까지 소화해 내면서도 어느 하나의 이미지에 고착되지 않는 연기자가 됐다. 무엇보다 10대 때부터 현재의 50대까지 하이틴·청년·중년을 넘어오는 그 모든 과정 동안 대중과 성장사를 함께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분명히 찾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똑같은 역할을 해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 그래서다.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변호사(하이에나)부터 근엄하고 냉철하면서도 속으로는 따뜻한 진심이 숨겨진 소년부 엘리트 판사(소년심판), 조선시대 실제론 존재하지 않았을 자식들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중전(슈룹), 돈 되는 거라면 뭐든 하는 팜므파탈의 밀수꾼(밀수)까지 김혜수여서 보다 매력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트리거’ 역시 김혜수표 열혈 탐사보도팀장이 보여 주는 매력이 강력한 기대감을 만든다.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당대의 갈증을 판타지로 채워 줘서다. 당연히 그 작품 속 인물은 시대의 다양한 갈증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김혜수가 시대의 아이콘처럼 보이는 건, 바로 그 갈증을 대변하는 인물을 자기만의 색깔로 일관되게 보여 줬기 때문이다.

‘직장의 신’ 미스 김이란 인물로 비정규직 여성들의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줬고, ‘차이나타운’ 같은 작품에선 남성 전유물로 여겨져 온 누아르가 여성 캐릭터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다. ‘시그널’에서 포기하지 않는 베테랑 형사 역으로 미제사건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면, ‘하이에나’ 같은 작품에선 성공을 향해 질주하며 사랑도 쟁취하고 싶은 현대 여성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러면서 이 역할 하나하나에 본인이 갖고 있는 호방한 면모를 더함으로써 더 톡 쏘고 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를 구현했다.

많은 역할 속에서 김혜수가 해 온 연기 면면을 들여다보면 작은 것에 연연하기보다 굵직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렇다고 디테일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세심함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시원하게 뻗어 나간다는 의미다.

흔히들 ‘호방함’이란 작은 일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김혜수를 보면 그게 오해라는 걸 알게 된다. 디테일을 갖고 있으면서도 목표를 향해 주저하지 않는 마음. 김혜수라는 대체불가 호방 본색의 페르소나가 새해에 우리에게도 제안하는 매력이 아닐까.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