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쾌재정 연설’로 전국구 ‘스타’가 되다
배재학당 토론회서 서재필과 첫 인연
독립협회 가입…관서 지방 지부 창립
평양 개최 ‘만민공동회’서 연사 등장
절묘한 수사법으로 정부·관료 등 질타
웅변 능력 입소문 퍼져 단골 연사 활약
협회 강제 해산되자 ‘점진학교’ 설립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남녀공학 기록
|
쾌재정(快哉亭) 연설
1898년 7월 25일 대동강변 쾌재정(快哉亭) 앞. 평양성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관리와 백성, 남녀노소가 함께 모이는 문자 그대로 ‘만민공동회’가 열리는 날이다. 마지막 순서로 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안창호가 연단에 올라서 여유 있게 청중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재인가 했더니 오늘 이 자리야말로 쾌재를 부를 자리입니다” “오늘은 황제 폐하의 탄신일인데,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 축하를 올리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니, 임금과 함께 즐기는 군민동락(君民同樂)의 날이라, 이것이 첫 번째 유쾌함이요.”
“감사 이하 높은 관원들이 이 축하식에 우리와 자리를 함께하였으니 관민동락(官民同樂)이라 이 또한 쾌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한데 모였으니 만민동락(萬民同樂)이라, 더욱 유쾌한 일이니, 이것이 오늘 쾌재정의 세 가지 유쾌함입니다.”
‘쾌재정’이라는 정자(亭子) 이름과 ‘만민공동회’의 명칭을 절묘하게 배합해 표현한 뛰어난 수사법이 아닐 수 없다. 청년 연사의 웅변에 청중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이어 안창호는 정부 고관들의 무책임, 부패한 관리들의 착취, 양반 관료들의 사치와 향락 등 세 가지를 불쾌한 일로 대비시키면서 정부의 무능함과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차례로 질타하며 연설 강도를 높여갔다.
연설이 끝나자 청중은 평생 처음 들어보는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내며 감동과 공감을 표했다. TV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지만 때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소문이 더 빠르고 멀리 가기도 한다. 이리하여 약관(弱冠)의 안창호는 일약 스타가 됐다.
“안창호는 영웅이래. 연설을 잘한다네. 사또가 혀를 빼고 머리를 들지 못했다더군.”
소문은 끝없이 이어졌고, 이후로 안창호는 독립협회 단골 연사로 활약하게 됐다. 그 후에도 언제 어디서나 도산의 연설이 있으면 회장은 만원이었다. 도산의 웅변은 타고난 재능이기도 하지만 “솔직하면서 간결하고 독창적인 표현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 도산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할아버지가 결정한 약혼
원래 총명한 데다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한 기초 위에 2년 동안 구세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안창호는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됐다.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구세학당을 졸업하고 잠시 고향에 돌아온 안창호에게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서당 스승 이석관의 딸 혜련과의 결혼을 약속하고 있었다. 어른들끼리 일방적으로 정한 약혼이었다. 그때 창호의 나이 18세, 혜련은 12세였다.
창호는 스승을 찾아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파혼을 요청했다. “저는 예수를 믿는데 선생의 가족은 믿지 않으니, 어떻게 혼인할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이석관은 곧 가까운 교회에 가서 전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창호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저는 공부를 했고 앞으로 더 많은 공부를 할 생각인데 따님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니’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참으로 당돌한 주장이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 기회에 아내가 될 이혜련도 공부를 시키자”는 것이 창호의 속셈이었을 것이고, 이석관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그럼 우리 딸도 공부를 시키면 되지 않겠나. 자네가 맡아서 잘 도와주게!” 어려서부터 안창호의 사람됨을 보아온 이석관으로서는 놓치기 아까운 사윗감이며 또한 그만큼 믿음이 갔기 때문이리라.
스승과 조부의 승낙을 받은 창호는 1897년 약혼녀 이혜련과 누이동생 신호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독립협회와 점진학교
한편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徐載弼·1864~1951)은 인종차별과 암살 위협 등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컬럼비아대에서 의학과 세균학을 공부하며 의사가 됐다.
1895년 서재필(Philip Jason)은 정부 초청을 받아 미국인 고문 자격으로 귀국했다. 서재필은 기울어가는 조국의 현실을 보고 과거 갑신정변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한번 조국의 진정한 독립과 계몽을 위해 헌신하기로 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대대로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또 국민 계몽을 위해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동시에 독립협회는 시국에 관한 6개 조의 개혁안을 고종에게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혁신 운동을 전개했다.
안창호는 배재학당의 토론회에서 서재필을 만난 인연으로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필대은과 함께 관서 지방에 지부를 창립해 평양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앞에서 언급한 쾌재정 연설은 그 첫 번째 대중집회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정부의 외곽 단체인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보부상 단체가 독립협회를 습격해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고종은 1898년 두 단체의 해산을 명령했다.
생애 처음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 안창호는 1899년 고향으로 돌아와 평양 강서군 동진면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웠다. 이 학교는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남녀공학으로 기록돼 있다. ‘점진’이라는 학교의 이름에는 실력 양성을 위한 도산의 방법론적 철학이 담겨 있다. 점진은 단순히 급진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쉬지 말고 꾸준히 실천해 나가자는 뜻이다.
점진학교는 최광옥, 이석원 등이 교원으로 있었으며 교풍이 엄격했다고 전한다. 한편 안정적인 학교 운영을 위해 강변을 매축(埋築)하는 사업도 함께 추진했다. 약 3년 동안 학교를 운영해 자리가 잡히자 안창호는 더 큰 꿈을 위해 학교를 형님(안치호)에게 맡기고 유학 준비를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 후 점진학교는 기독교 장로회에서 인수해 계속 운영하다가 광복 후 공산정권에 의해 폐지됐다고 한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