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파르테논 신전 건축(BC 447~438) - 페르시아전쟁 승리의 기념물을 세우다
해상 교통요지 식민도시 건설하다
지중해 노리던 페르시아와 전면전
군사력 열세에도 전략전술로 승리
지도자 페리클레스 황금시대 주도
전문가 모아 서양 건축물 교범 건설
시민 자부심·국가 정체성 불어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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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은 오늘날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기도 하다. 이런 상징성은 유네스코가 조직 로고 디자인을 만들 때 파르테논 신전을 형상화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 신전은 그리스 고전시대 예술적·건축적 성취를 표상하며, 그리스 신화는 물론 당시 그리스가 사력을 다한 끝에 승전한 페르시아전쟁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면 파르테논 신전은 왜 기원전 5세기 중엽 폴리스 아테네의 중심인 아크로폴리스에 건설된 것일까?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447년부터 438년까지 일명 아테네 ‘페리클레스(Pericles) 시대’에 건설됐다.
10여 년 동안 세 차례나 그리스 반도를 침공한 강대국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이끈 정치지도자로 올라섰다. 핵심 승전국인 폴리스 아테네의 지도자로서 그는 그리스의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이들 가운데 핵심을 이룬 과업이 바로 파르테논신전 건축이었다. 파르테논은 폴리스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기리기 위한 신전이었기에 도시의 정치적·군사적, 그리고 문화적 중심지인 아크로폴리스에 건립된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파르테논 신전은 페르시아 전쟁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페르시아 전쟁이란 무엇인가? 폴리스 아테네를 중심으로 정치·경제적 안정을 이룩한 그리스인은 지중해 연안 각지로 진출해 해상 교통요지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하지만 이런 해외 진출 과정을 겪으면서 그리스인들은 곧 강력한 벽에 부딪혔다. 이는 바로 오늘날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소아시아 일대까지 그 세력을 뻗치고 있던 강대국 페르시아제국의 존재였다. 소아시아 에게해 연안에 건설한 식민도시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한 그리스인과 오리엔트 지역을 장악하고 소아시아를 넘어 지중해로 영향력을 뻗치려던 대제국 페르시아는 곧 전면적인 대결 국면으로 치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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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페르시아전쟁(490~479BC)이다. 에게해 서안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페르시아 제국 압제에 저항해 봉기했고, 이를 본토의 아테네가 함선을 파견해 지원한 사건이었다.
이를 빌미로 페르시아는 기원전 492년을 시작으로 이후 약 1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 반도를 침공했다. 전체 국력은 물론 특히 군사력에서 크게 열세인 그리스 군은 중무장 밀집보병대(phalanx) 위주의 무기체계와 전략전술 우위를 토대로 유명한 마라톤전투(490 BC) 및 살라미스해전(480 BC)에서 대승을 거둬 최종 승자가 됐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전쟁이 파르테논 신전이나 페리클레스와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페르시아전쟁을 계기로 폴리스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의 강자로 부상했다. 페르시아의 거센 공격을 물리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495~429BC)라는 유능한 리더가 등장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 그리고 이에 기초한 문화적 융성을 이뤘다. 바로 이 시기 아테네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민주정(民主政)을 실험하고 파르테논 신전 건축을 비롯한 학문과 예술을 꽃피움으로써 오늘날 서양문명의 초석을 마련했다.
기원전 495년경 아테네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페리클레스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이자 군사 전략가로 아테네의 황금시대 개막을 주도했다. 탁월한 웅변술과 리더십을 발휘한 그의 영도 아래(461~429BC) 아테네에서 민주주의와 철학, 문학 및 예술이 꽃을 피웠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한 페리클레스는 실제로 아테네 시민들의 권리를 확장하고 이들의 현실정치 참여를 독려했다. 특히 그가 추진한 파르테논 신전 건설은 아테네의 정치적·군사적, 그리고 문화적 우위를 과시하는 결단의 산물이었다. 완공 이후 신전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으로 그리스 고전 문명의 상징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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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한 의미에서 파르테논 신전은 폴리스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신전 명칭에서 이를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파르테논’은 ‘처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아테나 여신의 순결과 처녀성을 상징했다.
신전 건설에는 그리스 반도 전체를 망라해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건축 설계자로는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 두 사람이 투입됐다. 신전 내외부의 조각작품과 장식을 제작 및 감독할 인물로 페리클레스 총애를 받은 페이디아스가 선발됐다. 그는 신전 내부에 세워진 12m에 이르는 거대한 아테나 여신상을 만든 주인공으로, 이후 역사 속에서 그리스 고전기를 대표하는 조각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가로 30m, 세로 70m, 높이 14m 크기 파르테논 신전의 주 건축은 도리아 양식이었다. 도리아 양식은 그리스 신전 건축의 가장 기본 양식으로, 간결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풍긴다. 실제로 파르테논 신전은 장중하면서도 단순함과 절제미가 빼어나 이후 수많은 서양 건축물의 전범(典範)이 됐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파르테논 신전은 단순한 도리아 양식에 머물지 않았다. 세부적 측면에서 혁신적인 건축 기술을 적용, 건물 전체를 완벽하고 세련된 형태로 만들고 있다. 특히 파르테논 신전은 뛰어난 조각 장식으로 긴 세월에 걸쳐 이름을 떨쳤다.
그 일면은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엘긴 마블(Elgin Marbles)’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엘긴 마블은 파르테논신전 지붕 하단부 프리즈(frieze)의 외관 장식 조각들을 19세기 초 영국 외교관이던 엘긴 백작이 수집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페이디아스의 지도와 감독 아래 제작된 조각들은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인 육체미와 신성성(神性性)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파르테논신전은 그리스 건축의 백미(白眉)로, 고전 건축의 이상을 실현한 증거물이었다. 이후 로마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고대 건축양식 형성에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파르테논 신전은 이러한 문화 예술적 측면에서만 돋보였을까? 물론 아니었다. 이는 아테네의 정치·군사적 우위를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폴리스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부심과 국가적 정체성을 불어넣었다.
더구나 신전은 아테네가 동방의 강대국 페르시아와의 긴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고, 이후 그리스 반도의 군소 폴리스들을 규합해 결성한 델로스동맹(Delian League)에서 중심 국가임을 표상하는 중요한 문화적 징표였다. 단순한 신전이 아니라 그리스 민주주의와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서, 이후 서구 문화와 예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5세기 이후 꽃핀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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