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우리 곁에, 예술

수행하듯 그어낸 색띠 저마다의 추억 한 줄

입력 2025. 01. 09   16:13
업데이트 2025. 01. 0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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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예술
Artist Studio 16. 하태임 - 반복적 행위와 시간을 머금은 컬러밴드의 향연

추상미술 거장 부친 하인두 권유로 프랑스 유학 
소통 불가한 문자들 활용 ‘벙어리 시리즈’로 표현
이후 반복된 붓질로 색 수차례 긋고 그으며 작업
혼란한 시대 명상의 순간 전하는 위로 즐겨볼 만

돌고래가 유영하듯, 파도가 춤을 추듯…

‘Un Passage No.241036’ (캔버스에 아크릴릭, 181.5×291㎝, 2024) 작가 제공.
‘Un Passage No.241036’ (캔버스에 아크릴릭, 181.5×291㎝, 2024) 작가 제공.



하태임 작가는 화가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세대 추상미술의 거장 하인두, 어머니는 동양화가 류민자 작가다. 동생 하태범은 조각가로 활동하는 예술가 집안이다. 가족의 천재적인 재능에 본인의 역량을 의심하던 하태임을 작가의 길로 이끈 사람은 아버지 하인두다. 일찍이 딸의 재능을 눈여겨본 아버지는 프랑스 유학을 권했고, 하 작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함께 파리로 유학길에 오를 계획이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를 여의고 하 작가는 홀로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창작의 기반을 쌓아 어느새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한 중견작가가 됐다. 아버지 산소가 마주 보이는 경기 양평군의 조용한 마을에 작업실을 마련한 하 작가는 시끄러운 일상을 등지고 종일 작업실에 머문다. 교수로 재직하던 학교도 관두고 온전히 작업에만 몰두 중이다.

그는 형형색색의 리드미컬한 컬러밴드(색띠)로 잘 알려진 인기 작가다. 초기 표현주의적 화풍과 문자 실험의 단계를 거쳐 다양한 색채로 추상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 하 작가의 초기 작업은 소통 문제의 천착이었다. 프랑스 유학시기 작가는 완벽하지 못한 언어로 인해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낯선 땅과 언어, 환경으로 인한 물리적·정서적 고립에 놓인 상황을 ‘벙어리 시리즈’ 등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 분절돼 의미 전달이 불가한 문자들이 화면에 등장했다. 단어 또는 문장을 잘라 일부만 제시한 문자는 본래 의미와 기능을 상실한 채 소통 불가한 기호로 작용했다. 특히 프랑스어로 적힌 문장을 일부만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언어를 프랑스인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하며, 하 작가는 혼자만의 유희적 언어 놀이를 즐겼다. 여기에 더해 문자 흔적을 지우는 과정을 거쳐 소통 기호를 더 견고히 매립시켰다. 이렇듯 초기 작품은 문자 쓰기와 숨기기, 지우기 과정을 통해 언어와 소통에 관한 개인적 고민을 담아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읽고 적고 소통하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쓰고 지우는 과정은 의미를 상실하고, 고유의 컬러밴드가 독립적 형태를 드러내게 됐다. 문자를 쓰고 그 의미를 지우는 과정엔 자연스럽게 반복적인 몸의 움직임이 덧입혀졌다. 그 과정은 팔을 궤적에 따라 붓질을 덧입히는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이었다. 그 수행적 행위의 반복이 누적돼 나온 흔적의 띠가 바로 컬러밴드다. 이후 하 작가는 언어 이전의 색채를 발견하고, 색채만으로도 온전히 소통 가능함을 깨달으며 색채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내 작업의 주인공은 컬러밴드다. 컬러밴드는 각각의 캔버스에서 옥색 대양에 마치 유영하는 돌고래처럼, 혹은 넘실대는 파고가 춤을 추듯 펼쳐진다. 반곡면의 컬러밴드들은 방향성과 수많은 차이를 수반하고 각각의 색으로 물들여져 삭막한 공간에 파동과 리듬감을 부여한다. …컬러밴드들은 신체의 ‘그리다’를 수행시키는 반복적 행위로 만들어지는 단순명시적 형태이며 최소한의 단위요소다.”(작가 노트)

하 작가는 캔버스를 눕혀 놓고 묽은 아크릴 물감을 칠하고 말리고 덧칠을 반복하며 색을 수차례 중첩시키는 방법을 고수한다. 누인 캔버스를 아래로 마주 보고 붓질을 반복하는 방식은 상당히 고된 자세이나 묽은 물감을 흐르지 않고 반복적으로 쌓아 투명한 발색을 내고자 한 선택이다. 붓질로 색상을 쌓아 올리면 켜켜이 축적된 레이어를 간직한 투명한 컬러밴드가 남게 된다. 이 컬러밴드는 빛을 품고 중첩된 색채와 붓이 스쳐 지나간 흔적까지 고스란히 품게 된다.


‘Un Passage No.243004’ (캔버스에 아크릴릭, 140×140㎝, 2024). 작가 제공.
‘Un Passage No.243004’ (캔버스에 아크릴릭, 140×140㎝, 2024). 작가 제공.



하 작가는 자신의 몸을 축으로 삼아 고정하고, 팔을 콤파스 날개와 같이 움직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색채의 레이어를 쌓는다. 컬러밴드는 작가의 팔이 머무르는 거리·각도 등 움직임의 흔적이 축적된 것이며, 반복적으로 색을 올리는 작가의 시간 축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무척 수고스럽고 노동 집약적 작업이다. 그는 이를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으로 스스로 우주에 순응하며 질서를 따라가는 것이고, 반복적인 노동이 주는 정신적 안정감과 쾌감을 느끼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동일한 방법론으로 제작된다고 컬러밴드가 모두 유사한 건 아니다. 색채 조합의 다양성은 물론 실험과 변주로 질감과 표현방식도 확장된다. 붓 외에 스펀지로 찍고 문지르고 휴지로 닦아 내는 등 매끈했던 화면에 흔적과 같은 우연적이고 자유로운 질감이 더해졌다. 색을 찾아가는 여정엔 제한된 색상 내의 조화와 변화, 한 색상 내의 다양한 스펙트럼 등 컬러밴드의 변주가 펼쳐진다. 또한 색채의 조화와 리듬감을 실험하면서 그동안 금기시해 오던 검은색과 흰색의 무채색 컬러밴드도 등장한다.

하 작가의 실험은 이제 ‘회전 이젤’을 고안해 물감의 흘러내리는 흔적을 적극 화면에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는 사실 그동안 꽤 강박적으로 한 치의 오차도, 한 방울의 물감 자국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방식을 고수해 왔다. 작업의 전 과정을 본인의 통제 아래 두고 불규칙성을 허락하지 않던 방식에서 물감이 흘러내리는, 작가의 손을 떠나 일어나는 우연한 과정을 수용하는 건 스스로 지금까지 지켜 온 고집과 신념을 뒤흔드는 실험이다. 이 실험에 그는 꽤나 적극적이다. 12방향으로 캔버스를 돌리며 작업할 수 있는 이젤을 스스로 설계·제작해 색채의 무궁무진하고 자유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작품은 간결해지고 자유로워졌으며, 작가는 해방감을 느끼게 됐다. 금기를 깨듯이 스스로의 규칙을 해체함으로써 맛본 자유로움은 또 다른 가능성을 안겨 줬다.

색은 감정, 분위기, 상징성 등을 전달하는 조형의 기본요소 중 하나다. 하 작가는 색채에 몰입해 무한한 변주의 조형 실험을 펼치고 있다. 색을 인식하는 것은 문화권·역사와 같은 환경적 요소가 작용한다. 동시에 각자 경험에서 나온 인식과 기억 등에 따른 개개인의 편차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언어로 표현하는 색상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인식될 수 없는 이유다. ‘녹색’이란 표현에도 초봄 봄기운을 안고 피어나는 새싹의 연녹색부터 한여름의 농익은 푸르름을 머금은 진녹색까지 무수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따라서 작가는 관람자 스스로의 기억과 느낌에 따라 컬러밴드의 의미를 발견하고 즐기길 권한다. 하 작가의 작품을 마주하면 그 색채 리듬에 눈이 곧바로 반응하며 각자의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 혼란한 시대 하 작가의 작품은 미리 찾아온 봄처럼 해사한 느낌을, 또는 차분한 명상의 순간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이 주는 위로가 절실한 요즘이다.

하태임(1973)은…
프랑스 디종국립미술학교 및 파리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나코 국제현대회화전에서 모나코왕국상(1999)을 수상했다. 포스코미술관, 가나아트센터, 파리 시테 데 자르 등에서 3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아트조선스페이스, 토탈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 등에서 개최한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모나코 현대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삼성전자, LG전자, 서울가정법원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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