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배달민족의 강역…“만주 잃으면서 우리는 편협해져”

입력 2025. 01. 02   15:05
업데이트 2025. 01. 0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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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백두산 너머 만주, 한민족이 말 달리던 곳

한민족 기원 환웅설화의 배경 백두산
한반도 산맥의 시작이면서 우리 옛땅
고구려·발해 멸망 이후 중국에 편입
시인 백석 “만주를 놓친 것은 배반”
1990년대 200만 명의 동포 살았지만
지금은 한족 이주로 10분의 1만 남아

 

겨울철 백두산 천지. 이정수 사진작가 제공
겨울철 백두산 천지. 이정수 사진작가 제공



유럽을 다녀오는 비행기 안에서 항공사(에어 프랑스)가 제공하는 위성사진을 통해 백두산을 봤다. 수직으로 찍은 사진이라 정상부의 눈 덮인 부분만 보인다. 높이 2744m의 활화산이다. 한반도의 모든 산맥이 이곳에서 시작한다. 민족의 얼이 기원한 영산이다. 정상에는 화산호수인 천지가 위용을 드러낸다. 천지에서 좌우로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송화강이 발원해 뻗어 나간다. 백두산이라는 지명은 우리 역사의 가장 오래된 문헌인 『삼국유사』에서부터 등장한다. 신라 때부터 한반도 산줄기의 근본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한민족의 기원 ‘환웅설화’도 이곳을 배경으로 한다.

백두산은 한반도의 국맥을 이루는 시원인 동시에 만주 시작점이기도 하다. 삼국시대에 백두산을 경계로 남북은 배달민족의 강역이었다. 백두산에서 흑룡강에 이르는 만주 벌판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선조들이 말 달리던 곳이다. 한반도의 4배 면적에 달하는 이 만주를 놓친 걸 구보는 늘 아쉬워한다. 20세기 들어 나라를 잃은 후 애국지사들이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도 ‘우리의 옛땅’이라는 잠재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구보는 여긴다.

구보는 북경 특파원 시절이던 1994년 3000만 평의 흑룡강성 삼강평원에서의 한 미장센을 잊지 못한다. 그곳 3300만 평에 농장을 조성하려던 대륙연구소 장덕진 소장과 함께 동포의 집에서 대파를 막된장에 찍어 독주와 함께 넘길 때 붉고 커다란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던 광경이다. 장엄했다. 풍경이 음식의 맛을 더한다는 생각보다는, 이 공간을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솟구쳤다. 개발계획이 차질을 빚어 무산되면서 ‘고구려 고토를 일부나마 되찾는다’는 흥분도 물거품이 됐다. 그날의 지평선 일몰만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기원전 37년 시조 고주몽이 예맥족의 부여를 멸망시키고 졸본(요녕성 번시) 지역을 중심으로 대제국 고구려를 건국했다. 영토는 흑룡강에서부터 한반도 북부에 걸쳤다. 연해주에서 함경도, 강원도에 걸쳐 분포하던 말갈·동예·옥저 등 동쪽 주변국을 흡수통합하고, 후한(後漢, 25~220)·위(魏, 220~265)·연(燕, 337~407)·수(隋, 581~619)·당(唐, 618~907) 등 서쪽 중국 왕조와 잦은 전쟁을 치렀다. 수와 당은 고구려와 무리한 전쟁을 펼치다 멸망했다.

중국 남부에 도읍지를 두었던 두 왕조가 머나먼 북동쪽의 고구려와 힘든 전쟁을 불사한 데서 구보는 당시 고구려가 차지한 비중이 황하에서 장강에 이르는 중원(中原)만큼 컸음을 짐작한다. 길림성 집안(集安)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가 고구려 기상을 웅변한다.

국경의 안시성에서 당 태종 이세민의 공격을 막아낸 전투는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크게 칭송했을 정도였다. 당시 성주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가 정조 때 박지원이 이 지역을 답사한 후 『열하일기』에 성주 이름을 ‘양만춘’이라고 기록했다(『월정만필』, 윤근수). 명나라의 『당서연의』에도 “절노부 주수(主帥) 양만춘이 전투를 주도했다”고 묘사됐다.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안시성이 황새의 음차이며, 백암성도 뱀의 음차’라고 풀이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구려가 내분 탓에 698년 신라에 정복된 후에도 만주는 발해에 승계되며 우리 영토에 남았으나 926년 발해 멸망 후 거란족이 흡수하면서 중국에 편입됐다.

우리 영토의 외연이자 호연지기의 잠재력을 품었던 만주를 잃은 걸 두고 시인 백석(1912~1996)은 ‘배반’이라고 표현하며 부끄러워했다. 평안북도에서 나고 자란 백석은 이민족 친구들과의 어릴 적 추억을 소중하게 여겼다. 구보는 드넓은 땅과 그 땅 위에서 공존했던 16종의 다양한 민족, 그리고 그 문화들을 놓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민족성은 호방하게 형성됐을 것으로 여긴다. 만주를 잃으면서 우리는 편협해졌다.

“아득한 ?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후략)”- ‘북방에서’

고구려는 다민족국가였지만 “한반도 남부와 풍습·언어가 같다(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는 『梁書』와 『南史』 등 6세기 중국 왕조의 기록에서 만주가 배달민족의 영역이었음이 확인된다.

구보는 1994년 고구려의 혼이 기원한 백두산을 처음 마주했다. 민족의 영산은 소름 끼칠 만큼 고요한 가운데 압도감을 줬다. 천지는 무서우리만치 푸르렀다. 비슷한 시기 천지에 매료당한 이정수 사진작가는 12년간 사계절 풍경을 렌즈에 담느라 백두산과 한 몸이 됐다.

구보는 백두산에서 시작해 해란강과 일송정, 연길과 용정, 송화강과 목단강 등 만주 산하를 두루 답사하며 선조들의 흔적을 더듬는 감격을 맛보았다. 동포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기웃거리면 모두 집안으로 청해서는 불문곡직 밥을 해 식사를 대접하는 정을 보였다. 지금 그 동포들은 대부분 한국에 들어와 있다. 1990년대만 해도 연길을 포함해 길림성 조선족자치주에는 200만 명의 동포가 살았으나 지금은 10분의 1 정도만 남았다. 그 빈자리를 한족이 파고들어 이제 연변은 조선족 특색을 많이 상실했다. 만주는 명나라 시대만 해도 버려진 땅이었다. 흙먼지 날리는 광활한 황무지에 비적이 난무하던 곳이었다. 청나라 건국 이후 만주족이 자신들의 근거지인 이곳을 부흥시키려 가까운 산둥성 사람을 대거 이주시켰다. 지금은 인구가 1억 명에 가깝다.

두만강과 접한 만주 동남쪽은 조선인이 황무지를 개간해 감자 농사를 지으며 거주지역을 형성해 왔다. 여진족과의 다툼이 빈발했으나 조선 조정이 챙겼다.

태종 6년 2월 18일 여진족이 침략하자 병마사 박영이 격퇴한 기록이 있다. 실록을 보면 세종과 세조도 변란을 일으킨 여진을 정벌하곤 했다(세종 15~19년, 세조 13년). 여진족은 두만강 연안에서 무역하며 지냈는데 명나라가 만주에 건주위(建州衛)를 세워 통치하려 들자 반발했다. 이 여진족이 여러 만주족을 규합해 세운 청나라가 중원을 흡수하면서 만주는 중국의 영토로 굳어져 버렸다.

비록 고구려의 옛 땅은 오래전에 잃었지만, 구보는 그 공간을 마음에 늘 간직하려 한다. 언젠가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압록강을 지나 만주를 관통해 유럽까지 달릴 그날을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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