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키는 대로, 닿는 대로
⑬ 전남 강진에서 맞는 새해
뱀이 허물을 벗듯
훌훌 털어 내고 싶거나 인생의 참맛이 궁금할 때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차 한 모금에 정신 깨치고
성곽 걸으며 역사 되새기고
민화 속에서 과거와 현재 배워
2025년 새해가 밝았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한 해를 시작해야 할 때다. 유난히 무거운 분위기로 맞이하는 새해가 됐지만, 훌훌 털어 내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차분하게, 그러나 설렘으로 가득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전남 강진군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하면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역사 유적지를 거닐어 보자.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민화를 감상하며 마음을 가볍게 달래 보는 것도 좋겠다.
# 다산초당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강진군을 ‘남도 답사 일번지’로 소개한다. 전라도 지역의 방어를 책임지는 전라병영성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조선시대 유배지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일 터. 수많은 선비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천주교도가 돼 선교활동을 했다는 이유였다. 조선 후기 최고의 유학자이자 실학자로 꼽혔던 그는 강진에 틀어박힌 채 학문을 갈고닦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그의 외가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외가에 어마어마한 양의 책이 있었기에 정약용은 이를 바탕으로 공부와 집필에 몰두했다. 강진군 백련사 인근 만덕산 중턱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18년 유배기간 중 약 11년간 생활했던 집이다. 그는 이곳에 머무르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수많은 저서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산 중턱에 외로이 자리한 이 작은 건물에서 그는 끊임없이 글을 읽고 연구하며 백성을 위한 책을 남겼던 것이다.
다산초당을 정약용의 귀양살이 이야기가 담긴 역사 유적지라고만 여기기엔 주변 풍경이 너무나 고즈넉하다. 동백과 비자나무로 가득한 숲은 물론 나무 사이로 보이는 강진만의 정취 또한 고요한 매력을 자아낸다. 정약용이 보고 느꼈던 모든 게 다산초당에 오롯이 남아 있는 셈이다.
정약용의 발자취를 따라 숲을 거닐어 보자. 남도의 매력을 가득 품은 오솔길이 펼쳐진다. 겨울에서 봄으로 향하는 시기에는 새빨간 동백꽃을 만날 수 있다. 다산초당 뒤로도 오솔길이 이어진다. 백련사로 향하는 길이다. 백련사의 혜장 스님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실제로도 이 길을 따라 교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백운차실
정약용은 혜장 스님에게 다도를 배운 뒤부터 차를 즐겨 마셨다. 그는 혜장 스님뿐 아니라 제자들과도 다도를 즐겼다. 강진 유배생활을 마치고 경기 남양주로 돌아간 이후에도 정약용의 차 사랑은 계속됐다. 제자들은 그를 위해 ‘다산계’를 맺었고, 매년 차를 만들어 남양주로 보냈다. 다산계는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였던 이시헌은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정약용의 사후에도 그의 집안에 매년 차를 보냈던 것. 이시헌의 후손도 대를 이어 차밭을 일궜고, 다산계의 정신을 이었다. 100년 이상 지속된 전통이었다.
이시헌의 후손, 이한영 또한 어릴 때부터 차를 재배했다. 그가 40대가 됐을 무렵 ‘백운옥판차’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우리의 녹차를 알리기 시작했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국내산 차를 일본산으로 둔갑시켜 판매하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국내 최초의 차 브랜드가 탄생했다. 백운옥판차는 맥차, 작설, 모차, 기차 등 4개 등급으로 품질을 나눠 판매됐다.
지금은 차밭 옆에 자리한 ‘백운차실’이 이한영의 유지를 잇는다. 이한영의 생가를 복원해 옛 모습을 되찾았고, 그 안에 독립적인 다도공간을 마련해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차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고택의 따스한 방에 앉아 월출산을 감상하며 일행과 차담을 나누기에 좋은 곳이다.
백운차실은 간단히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와 독립된 공간인 차실을 운영한다. 차실은 예약을 해야만 이용할 수 있는데, 녹차와 소소한 다식을 함께 제공한다. 당연히 백운옥판차를 취급한다.
# 전라병영성
전라도는 왜구들에게 좋은 표적이었다.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어 먹을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전라병영성은 광주목(현재 광주광역시)에서 이곳 강진으로 옮겨졌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의 일이었다.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전라병영성은 최전방이었다. 강진만으로 상륙한 왜구들이 월출산 옆을 지나 나주평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는 역할을 해서다. 전남의 중심부라는 이유로, 서남해안과 제주를 아우르는 육군 총지휘부 역할을 도맡기도 했다.
전라병영성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소실됐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거의 모든 시설이 사라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을 되새기고자 현재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 성벽과 성문을 복원했고, 내외부에서 발굴 조사가 한창이다. 땅을 판 뒤 죽창을 꽂아 침입자를 막았던 함마갱 유적 수십 기, 해자의 흔적 등이 성벽 외곽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전라병영성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옆 하멜기념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라병영성 축조 과정, 마을 역사, 네덜란드인 선원으로 조선에 13년이나 억류됐던 헨드릭 하멜에 관한 이야기가 이곳에 전시돼 있다.
# 한국민화뮤지엄
민화는 서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그림이다. 관혼상제 등 인생의 주요 의례에 사용하기 위한 것, 그 모습을 담은 게 대부분이어서다. 유명 작가들이 그렸다기보다는 떠돌이 화가들의 그림이 많다는 점도 민화가 서민과 가까이 있음을 방증한다.
그래서일까. 민화는 작품성만 추구하기보다 실용적 목적으로 활용되는 게 많았다. 공간을 분리하거나 외풍을 막고 실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용도 등으로 말이다.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여겨지는 민화는 최근 들어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민화 화풍을 그대로 계승한 채 현재의 인생사를 담아낸 그림이 많아지고 있다.
민화의 과거, 현재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모습을 강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국민화뮤지엄은 국내 최대 규모의 민화 전문 전시관으로, 무려 200여 점의 전통민화를 상설 전시한다. ‘일월오봉도’ ‘호작도’와 같이 유명 민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건 물론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들의 재치 넘치는 작품도 만나 볼 수 있다. 한국 민화 트렌드는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작품을 직접 만들어 보는 것도 가능하다. 부채 등 다양한 오브제에 민화를 그리고 채색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 상설 운영된다. 상주하는 선생님들이 누구나 쉽게 민화를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므로 어렵게 느낄 필요는 없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