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모임에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던 중 한 친구가 다짜고짜 올해 혈액형이 바뀌었다는 다소 황당한 근황을 전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단체로 실시한 혈액형 검사에선 A형이었는데, 최근 대학병원 검사 결과 O형이 나왔답니다. 예전에 단체로 한 혈액검사에선 이런 기입 오류가 종종 발생했다고 하네요. 가정 불화를 초래할 수 있는 오류가 아니었던 건 다행이지만, 어쩐지 배신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A형이라 소심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면서요. 새로운 혈액형을 받아들인 뒤 성격도 O형처럼 활달하고 외향적으로 변한 듯하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웃자고 한 친구의 이 말이 한참이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친구의 혈액형은 갑자기 바뀐 게 아니라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을 뿐인데, 스스로 성격이 변한 것 같다고 느낀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재미로 봤던 혈액형별 성격이지만 무의식중에 그보다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A형은 내성적이고, B형은 개방적이고, O형은 사교적이고, AB형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혈액형별 특징이지만, 사실 과학적 근거도 통계적 수치도 빈약한 일종의 ‘선입견’인데 말이죠. 물론 맹신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내향적 성향을 A형이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의심하지 않고 바로 납득했던 것 같네요. 선입견이라고 하면 부당한 것만 생각하곤 하는데, 오히려 무의식 속 정체성을 형성하는 곳에는 이런 ‘가벼운’ 선입견이 더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말하는 사람인데….”
처음 조명탄 기고 제안이 왔을 때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던 생각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글 쓰는 이와 다르다는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었던 듯합니다. 만약 이런 생각에 매몰돼 끝까지 기고를 고사했다면, 지난 1년은 매우 달랐을 겁니다. 처음엔 제 글이 창피해 배달된 국방일보를 숨기곤 했지만, 이젠 잘 읽고 있다는 분들의 의견을 뿌듯해할 정도의 염치도 생겼습니다. 최고의 안보·군사전문가들의 의견 옆에 제 글이 실리는 건 여전히 부끄럽지만, 장병들의 고민과 관심사가 무엇일까 고민한 제 진심을 알아주신 것 같아 벅찹니다.
조명탄 덕분에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선입견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한 해였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글이지만, 다시 글을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제는 조금 덜 망설이고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글자들 사이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구어체의 어색함을 참고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는 정체성의 여러 조각 중 일부를 확대해석해 그동안 놓친 기회는 없었는지. ‘방송인이니까’ ‘여자라서’ ‘문과라서’ ‘해 본 적이 없어서’ ‘젊어서’ 혹은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아서’와 같은 선입견을 도전하지 않을 핑계로 삼지는 않았는지. 올해를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선입견 때문에 기회를 지나치는 일이 적었으면 좋겠습니다. 혈액형에 기반한 성격 유형만큼이나 근거가 부족한 이런 선입견에 자신을 가두면 너무 억울할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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