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영롱한 신념의 빛 따라 이슬처럼 하늘의 품으로…

입력 2024. 12. 26   16:01
업데이트 2024. 12. 2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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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새남터, 천주교 순교 성지


억새와 나무가 많은 터라는 뜻이지만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삶을 택했던
사육신과 천주교 사제들의 참수 형장
효·애 실천한 김대건 신부도 이곳서…
버려진 시신 수습 신도가 지게에 실어
1주일 걸어 경기도 안성 미리내 안장

 

새남터순교기념성당. 필자 제공
새남터순교기념성당. 필자 제공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한강변은 새남터라는 지명을 갖고 있다. ‘억새와 나무가 많은’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서울지명사전』). 선입견 탓이겠지만 구보는 새남터라는 이름에서 북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느낀다. 중죄인을 참수하던 형장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1456년 세조의 왕위 찬탈에 맞서 단종의 복위운동을 펴려다 밀고당한 성삼문 등 사육신이 역모죄로 이곳에서 참형당했다. 19세기에는 천주교 성직자들이 차례로 이곳에서 순교했다. 새남터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신념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자기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고선 죽음을 택했다.

지금 이곳에는 성당이 들어서 있다. 4번의 박해에서 순교한 11명의 성직자를 기리기 위함이다. 순조 원년이던 1801년 1월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금교령(禁敎令) 지시로 집행된 신유박해 때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피에르 모방·자크 샤스탕·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 등 세 신부, 1846년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주교 등 6명의 프랑스 사제가 형장의 이슬이 됐다.

19세기 조선 사회는 천주교가 유입되자 큰 위기를 느꼈다. 천주교의 만민평등사상이 신분제 질서에 바탕을 둔 유교체제에 정면으로 배치됐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천주교를 ‘사악한 학문(邪學)’으로 규정하고 접촉자를 엄벌에 처했다. 박해가 계속되던 엄혹한 시절이었음에도 청년 김대건이 천주교에 귀의한 사실에 구보는 경외감을 느낀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는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형돼 군문효수(軍門梟首)됐다. 군율을 적용해 목을 베고 군문에 매다는 형벌이었다.

구보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 가족 성당) 내부에 새겨진 세계 100대 성인 가운데 ‘A(ndrea) Kim’을 보고선 김대건 신부를 재인식했다. 유네스코와 천주교가 인정하는 그의 종교사적 위상 때문이었다. 김대건 안드레아는 순조 21년인 1821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다. 증조부 김진후가 천주교에 입교했다가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돼 옥사했고, 조부에 이어 부친도 순교한 집안이었다. 부친 김제준은 1836년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던 모방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 해에 조선에 들어온 모방 신부는 부활절 주간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다가 소년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했다.


새남터 순교 성직자들. 필자 제공
새남터 순교 성직자들. 필자 제공



김대건은 샤스탕 신부를 따라 12월 3일 압록강을 넘어 중국을 남하해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당시 포르투갈의 조차지였던 마카오는 홍콩과 함께 ‘동양 속의 서양’이었다. 상업도시 홍콩과 달리 천주교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김대건은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에서 신부 수업을 받고 1845년 1월 조선에 잠입, 박해로 큰 타격을 받은 천주교를 재수습한 후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그해 10월 12일 다시 귀국해 사목 활동을 폈으나, 경기도 용인 은이 공소에서의 두 달이 전부였다. 이듬해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려다 6월 5일 체포돼 포도청에서 3개월간 문초를 거친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제가 된 지 1년1개월 만이었다(『한국 가톨릭 대사전』). 

김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지 40일이 지난 10월 말 신자 이민식 빈체시오가 버려진 시신을 수습해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의 미리내에 안장했다. ‘미리내’는 은하수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조선 후기 가톨릭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신앙촌이었다. 밤이면 언덕배기의 집마다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시냇물에 반사돼 은하수를 방불케 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경기도 광주와 양평, 시흥, 화성, 용인 등과 함께 천주교의 초기 선교지역을 이루던 곳이다. 국사범 시신을 위험을 무릅쓰고 빼돌려 지게에 매고선 1주일을 걸어 옮겨온 사실은 감동적이다. 존경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정성이었다. 미리내는 50년 후인 1896년 본당이 설정됐다. 1972년부터 성역화 작업을 거쳐 1989년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을 완성했다.

김대건 신부가 남긴 편지와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한국천주교가 유추한 결과는 김 신부의 목표는 ‘신앙 전파라기보다 조선의 전통사상 혁파’에 있었다. ‘중화주의 사대사상을 극복하려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구보는 그 부분에서 흥미를 느꼈다. 조선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며 세계를 문명과 비문명으로 나누는 ‘사해(四海) 사상’에 갇혀 있었다. 중국을 핵으로, 조공을 바치는 조선 등을 그 문명권 안에 있는 내해(內海)쯤으로, 4해 바깥은 야만으로 규정했다. 김 신부가 접한 천주학은 서양이 결코 야만이 아니라 오히려 앞선 문명임을 가르쳐 줬다. 그는 서양의 선진 학식을 신앙 실천을 통해 전파하려 했다.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김 신부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유교적인 효의 개념에다가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이 혼합돼 있다.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은 창조주, 심판관, 절대자, 보호자, 조력자, 그리고 은총으로 섭리하는 분이었다(『한국 가톨릭 대사전』).” 구보는 김 신부의 생각에서 당시 조선 백성들이 얼마나 자애로운 임금을 갈망했는지 절감한다. 현실은 세도정치가 난무하며 왕이나 귀족이나 한결같이 무능하고 부패했다. 백성의 삶은 뒷전이었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만나기 어려운 군주상을 하느님에게서 찾은 것이다. 김 신부는 순교도 ‘효(孝)와 애(愛)’라는 틀로 받아들였다. 순교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덕행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당신 양들을 위해 자의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듯, 사목자도 양들을 위해 자의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의식했다. 그것을 최고의 청원으로 여겼다(『한국 가톨릭 대사전』).

사형 집행 전 김 신부는 신도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시련을 견디는 충실한 신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한 몸같이 형제애를 나눌 것’을 권고했다. 김대건 신부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구보는 조선의 현실을 타파하고 싶다는 염원으로 천주의 자비를 구하려 생명도 내놓았던 청년 김대건의 삶을 아프게 받아들인다. 그는 순교하기 전 자신에게 서품했던 상하이의 페리올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어머니 우르술라는 지금 효자 아들 곁에 나란히 묻혀 있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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