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미국의 무적 복서 조 루이스는 23차례나 헤비급 타이틀을 방어한 후 도전자가 없어 스스로 은퇴했다. 12년 동안이나 정상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나는 감기에 걸린 적이 없다”고 답했다. 지독한 건강관리로 언제 어떤 도전자와도 맞설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이었다. 1977년 11월 29일 한국의 복싱 영웅 홍수환은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 경기에서 파나마의 강타자 카라스키야에게 2회전에서 네 번이나 다운당했지만 3회전에서 회심의 왼손 훅으로 기적 같은 KO승을 거뒀다. 그의 ‘4전 5기’ 신화는 지금도 국민 사이에 회자한다. 카라스키야는 승리를 확신하고 잠깐 방심했다가 홍수환의 기습적 일격에 무너졌다. 안보도 그런 것이다. 도발에는 즉각, 강력히, 그리고 끝까지 대응하는 의지와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는 태세가 필수다. 그래서 한국군은 ‘즉·강·끝’을, 주한미군은 ‘파이트 투나잇(Fight Tonight)’를 외친다. 그런 의지와 태세가 실종된 군대는 자신과 부모 형제를 죽음으로 내몰고 조국의 패망을 초래한다. 시리아 사태는 이 교훈을 뼈저리게 상기시키고 있다.
다양한 민족과 종파가 뒤섞인 시리아는 도처에 반대 세력이 발호하는 나라였지만,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와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는 러시아와 이란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반군을 제압하고 54년 동안이나 세습독재를 누렸다. 2011년 ‘아랍의 봄’이 확산하면서 중동과 아프리카 곳곳에 자유를 외치는 시위가 일어나고 시리아에서도 내전이 시작됐지만, 아들 알아사드는 무자비하게 반대파를 감금·고문·처형했고, 화학무기로 자국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정부군은 반군들을 변방으로 내쫓고 국토의 85%를 장악한 상태에서 견고하게 독재정권을 지켰다. 그 과정에서 50만 명이 사망하고, 2300만 인구의 절반이 난민 또는 망명자로 전락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사태로 러시아와 이란이 지원을 중단하자 수니파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조직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 또 다른 수니파인 시리아국가군(SNA), 쿠르드 반군 등이 연합해 11월 27일 북부 알레포 지역에서 공격을 개시하자 정부군은 고가의 군사장비를 버리고 도주했다. 불과 11일 만인 12월 8일 반군이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 직전에 알아사드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도주했다. 13년 동안 이어진 내전은 그렇게 끝났고, 철옹성 같았던 독재정권은 카라스키야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러시아와 이란이라는 ‘돌봄 선생님’이 떠나버린 정부군은 영혼이 빠져나간 오합지졸이었다. 남베트남군도 그랬다. 1973년 파리평화협정으로 포성이 멎은 후 남베트남이 연일 반미·반정부 시위로 혼란을 거듭하자 월맹군은 1975년 1월 8일 평화협정을 깨고 남침을 재개했다. 4월 30일 남베트남군이 버린 미제 전차들을 앞세우고 사이공으로 진주했다. 도망가기에 바쁜 남베트남군에 미군이 남겨준 전투기, 전차, 총 등은 무용지물이었다.
이런 사례들이 한국군에 주는 교훈은 매우 분명하다. 군대가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국가는 생존하지 못하며, 동맹은 소중하지만 그런 나라에 군대를 보내줄 동맹국은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군은 시리아 사태를 거울삼아 ‘자강’ 의지와 ‘즉·강·끝’ 정신, 그리고 항재전장(恒在戰場) 태세로 군무에 임해야 한다. 그것이 도발을 억제하고 강건한 동맹도 지켜내는 길이다. 적에게는 무서운 맹수가 돼야 하고, 내국민에게는 친절한 양이 돼야 한다. 안보정세가 엄혹하고 국내 정치가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더욱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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