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조국과 국군의 영원히 꺼지지 않을 ‘우둥불’로 남다

입력 2024. 12. 17   15:37
업데이트 2024. 12. 1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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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 철기의 ‘우둥불 리더십’<끝> 

30여 년 군인으로 항일투쟁 ‘초지일관’
광복군 창설·한반도 진격 ‘도전정신’
한미 합작·공산주의 거부 ‘미래 통찰’
재물·지위에 초연한 깨끗한 사생활
가족보다 부하 먼저 생각한 전우애
모두 애국심 바탕 군인정신서 비롯

철기는 1972년 5월 11일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서거했다. 철기의 국민장 운구 행렬. 필자 제공
철기는 1972년 5월 11일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서거했다. 철기의 국민장 운구 행렬. 필자 제공



철기 이범석은 그만의 독특한 리더십을 남겼다. 필자는 그것을 ‘우둥불 리더십’이라고 이름 지었다.

리더십의 첫째는 애국심


‘애국심’은 우둥불 리더십의 핵심이다. 철기의 애국심은 자칭 ‘애국’이 난무하던 시절 진정 몸으로 던져 만든 애국이었다. 남에게 ‘애국’하라고 말하는 ‘애국’이 아니라 본인의 몸으로 ‘애국’의 길을 보여 줬다. 애국심은 지도자 덕목의 기본 중 기본이다. 이범석은 16세의 어린 나이, 남들은 고등학교 학업에 열중하던 시절 험난한 중국 망명길을 선택했다. 그 결단의 바탕은 애국심이었다. 중국 운남군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청산리전투까지 그의 삶은 열정과 도전정신의 연속이었다. 열악한 30여 년간의 항일무장투쟁 기간을 군인으로 초지일관했다. 그러한 도전정신과 초지일관 자세의 바탕 역시 애국심이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승인 지연으로 광복군 창설이 늦어지고 있었을 때 우선 창설부터 해야 한다는 도전적 안을 낸 것은 철기였다. 일제의 조기 항복으로 독수리계획이 허무하게 끝나자 지체 없이 국내로 들어가자는 또 한 번의 도전적 안을 낸 것도 철기였다. 그 도전적 자세의 바탕 역시 애국심이었다. 그가 환국 직전 쓴 글인 ‘구존유금 지재보국(苟存猶今 志在報國)’이 그 정수다. 그의 애국은 비분강개를 바탕으로 하되 투쟁 목적은 살아서 나라에 보답하기 위함이란 소신이 담겨 있어 우리 가슴에 와닿는다.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

청산리전투 이후 공산 러시아행에 관한 독립군 노선투쟁 시 철기는 단연코 공산주의는 우리 미래가 아님을 주장했다. 많은 독립군 지도자가 공산주의에 의지하려 할 때 철기는 이를 거부했다. 시대를 내다보는 통찰력이다. 중국군의 9개 준승으로 대외활동이 제약받자 대부분의 임시정부와 광복군 지도자는 세계대전 이후를 내다보는 전략적 판단보다 내부 노선투쟁에 몰두했다. 그때 철기는 한미 합작이란 시대를 넘는 통찰력과 추진력을 발휘했다. 철기는 항일투쟁 시절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수부장, 낙양군관학교 한적군관대장직을 역임하며 미래를 위한 청년 독립군 양성에 매진했다. 환국 이후 민족청년단 창설은 새 시대 미래를 위한 역군을 길러 내기 위한 시대를 내다보는 통찰력의 결정판이었다. 역사학자 정인보 선생은 “철기는 치신(治身·몸을 다스리는 것)과 치군(治軍·군을 다스리는 것)이 둘이 아닌 것을 믿고, 그는 청년들을 훈련한다기보다 자신이 청년 속으로 들어가 같이 울고 같이 뛰고 같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치고 같이 이 땅 위의 새 엔진이 되자는 소원을 가졌다”고 쓰고 있다.


낭만과 여유, 건실·청렴한 삶

철기는 상대와 이야기할 때 시로 대화한다고 할 만큼 문학적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그는 광복군 시절 항상 서랍에 시집을 간직하고 암송했다. 문장과 문필에 능하고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낭만주의자였던 철기는 베토벤, 드뷔시, 차이콥스키 등의 유럽 가곡을 좋아했다.

무인 기질과 예술가적 감수성을 동시에 갖춘 철기는 소탈하고 성실하며 겸손해 한번 만나 본 사람은 끌리게 하는 인간적 매력을 지녔다. 균형감 있는 지도자라는 말이다. 지도급 인사들의 부정축재가 횡행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판을 치던 광복 직후 혼란기에 최고위 지도자였지만 철기 부부는 재물에 초연한 청렴과 건실한 사생활을 보여 줬다.

그는 항일무장투쟁의 영원한 동지인 김마리아 여사와 평생을 해로했다. 관직을 내려놓고는 서울 사대문 안에 집 한 채 마련할 길이 없어 변두리 북아현동, 약수동, 신당동, 대방동 등 산동네를 전전했다. 대방동 시절 식량이 떨어져 두 내외분이 고초를 겪었던 일화는 지도자가 반드시 갖춰야 금도가 무엇인지 드러낸다.

 

철기 이범석 장군 안장식 장면. 필자 제공
철기 이범석 장군 안장식 장면. 필자 제공



동고동락하는 전우애

무수한 전투 속에서 그는 늘 전우들과 같이 있었다. 그의 회고록 『우둥불』은 군인의 무한한 애국심과 전우애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산 기록이다. 한번은 광복군 창설 당시 네 살 아들이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부인이 병원에 데려가겠다는 것을 거절했다. 얼마 전 한 부하의 다섯 살 아들의 치료를 제때 지원해 주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했던 미안함 때문이었다. “부하와 동지들에게 양심·도리상 그럴 수 없다”는 게 철기의 마음이었다. 부인 김마리아는 아들을 살리고자 몰래 병원에 데리고 갔다가 “당신은 매국노”라는 매서운 언사를 들어야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옆에 두고 부부는 사흘 밤을 꼬박 새웠다. 철기의 동지애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군인정신

우둥불 리더십의 핵심은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군인정신이다. 철기는 운명하기 5개월여 전인 1971년 겨울 회고록 『우둥불』을 탈고했다.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예감했던 걸까? 그는 회고록명을 우둥불로 붙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둥불은 함경북도 방언으로 모닥불을 지칭한다. 우둥불은 한데서 잠을 자는 군인들이 몸을 덥히기 위해 피우는 불이다. 나는 독립투쟁 30여 년간을 대개 이 우둥불 곁에서 지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선에서, 광야에서, 몽고에서 사냥할 때나 혼자서나, 또 몇 사람이 둘러앉아 잡담을 할 때나 수많은 군대를 데리고서나, 그 어디서나 이 우둥불은 나의 없지 못할 반려였다. 둥불, 그 불길을 바라보며 때로는 어린 시절을 회상했고 그리운 조국을 생각했다. 우둥불 앞에서 불꽃 사이로 어른거리는 회상, 쓰러져 간 전우들을 생각했다. 우리의 자유를 꿈처럼 그려 보기도 했다. 조국의 앞날을 환상으로 엮어도 보았다. 이글대는 불길 속에 내일의 승리를 다짐했다. 상념은 하염없이, 막연한 후세대의 생각도 해 보았다. (중략)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 밤하늘에서 휘황찬란히 수놓는 네온사인의 채광을 보다가도, 가끔 옛날의 우둥불 생각에 빠지곤 한다. 이처럼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 우둥불이기에 앞으로 계속 낼지도 모르지만, 우선 나오게 된 이 책에 우둥불이라고 이름 붙였다. (후략)”

철기에게 우둥불은 고달픈 현실을 이겨 내는 힘이자 전우애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미래의 소망이었다. 결국 철기는 죽어서 조국과 국군의 영원한 ‘우둥불’이 됐다. 우리는 그의 우둥불 리더십을 통해 남북이 분단된 한반도의 엄연한 현실에서 국가와 국민을 확고하게 지킬 수 있는 만반의 대비태세와 각오를 소홀히 해선 안 될 것이다.

 

필자 박남수는 현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으로 육군사관학교장과 서경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를 통해 장군의 리더십과 군인정신을 알리고 있다.
필자 박남수는 현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으로 육군사관학교장과 서경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를 통해 장군의 리더십과 군인정신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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