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골목 속으로
① 안데스의 보석 볼리비아 라파스
한라산·백두산보다 높은 곳에 있는 도시
고산병에 머리 어질어질, 풍경에 눈이 어질어질
늘어선 차와 다닥다닥 집들 모자이크 연상
거미줄처럼 얽힌 케이블카 오를수록 짜릿
추위·바람마저 비켜간 천연 요새
해발고도 3600m. 한라산·백두산보다 더 높은 곳에 도시가 있다. 바로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거대한 스타디움을 보는 듯하다. 관중석처럼 보이는 경사면엔 다닥다닥 집들로 채워져 있고, 아래로 내려가면 현대식 빌딩이 버섯처럼 솟아 있다. 케이블카가 사방팔방 그물처럼 연결돼 있고 골목골목은 사람과 차, 사고파는 물건으로 북적인다. 아름다움의 기준이야 다를 수 있다. ‘활력’과 ‘독특함’이 기준이라면 라파스를 능가할 도시는 없다.
히말라야를 등반한 것도 아닌데 고산병에 머리가 어질어질, 압도적 풍경에 눈이 어질어질하다. 유명한 곳은 예측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라파스는 그 어떤 예상도 허락지 않는다. 놀라움과 재미가 끝도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10년 후엔 더 세계적인 관광지가 돼 있을 터. 꿈의 여행지로, 최고의 골목여행으로 라파스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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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도 믿기지 않는 압도적 풍경
페루에서 버스를 타고 볼리비아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교통체증이 심하기로 악명 높은 길이다. 운이 좋았는지 평소보다 도로가 한산했다. 볼리비아 휘발유 사정이 좋지 않아 주유소마다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심지어 차를 대기시켜 놓고 다음 날 와서 겨우 휘발유를 넣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도 도심 진입은 쉽지 않아 먼지 자욱한 창밖 풍경에 굳은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다. 뼈만 남은 주인 없는 개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변변한 건물 한 채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먼 곳까지 와서 내가 왜 이런 광경을 봐야 하나? 건방을 떨 때쯤 서서히 라파스로 진입한다. 내가 탄 버스는 도시의 꼭대기쯤을 지나쳤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만 같은 기묘한 풍경이다.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형경기장 같기도 하고, 초대형 깔때기 같기도 하다. 아니면 초대형 바가지 정도일까?
대도시는 사람이 만드는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라파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멋진 모자이크였다. 그 어느 도시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첫인상에 완벽하게 압도됐다.
절대로 지지 않는 볼리비아 축구의 비밀
해발 3600m는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방문해야 할 수준의 높이다. 고산병의 대표적 증상으로는 어지러움, 구토, 호흡곤란 등이 있다. 심하면 기절하거나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한다. 볼리비아는 남미 대륙을 세로로 관통할 경우 중간쯤에 있다. 라파스는 그런 볼리비아의 또 중간이다. 남미의 중심 중 중심이 라파스다. 라파스 주변은 해발고도 4000m 안팎의 안데스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일리마니산으로 해발고도가 6460m나 된다. 높은 지대를 더 높은 산이 보디가드처럼 에워싸고 있다.
라파스의 축구경기장은 선수들의 무덤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축구를 제일 잘한다는 브라질, 아르헨티나도 라파스만 오면 흐물흐물해져 버린다. 걷기도 힘든 곳에서 90분 내내 뛰는 건 운동선수라고 해도 끔찍한 고통이다. 볼리비아 홈경기는 이변이 없는 한 최소한 무승부다. 지는 일이 거의 없으니 늘 잔치 분위기. 1994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할 당시 예선전에서 딱 한 번 졌는데, 그 패배를 안긴 나라가 바로 볼리비아다. 물론 그 경기는 당연히 라파스에서 치러졌다.
라파스가 협곡에 세워진 이유
라파스는 원래 ‘추키아고(Chuquiago)’라고 불리는 인디언 거주지였다. 1548년 스페인 정복자 알론소 데 멘도사가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 당시 스페인과 페루에서 벌어진 내전 종식을 기념하기 위해 라파스라고 지었다. ‘라파스(La Paz)’는 스페인어로 평화를 뜻한다. 알티플라노고원 지대 협곡에 자리하고 있는데, 협곡 내부는 기온이 상대적으로 따뜻해 추위와 바람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 외부의 적이 쉽게 침입할 수 없는 천연 요새 형태여서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쉽다. 주요 무역 경로가 교차하는 지역이니 상업 중심지로 내내 번성했음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당시 라파스는 누구라도 살고 싶은 도시였을 것이다. 추위와 바람이 비켜 가는 아늑한 은신처인 데다 물건과 돈이 넘쳐나는 활력의 도시였으니 말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탈길마다 오가는 차와 인파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여행은 사람 보는 맛도 있다. 떠들썩함은 유쾌한 생동감이고, 라파스를 대표하는 정체성이다. 고산에 적응만 한다면 이보다 더 재미난 도시도 없다.
공중 대중교통의 신세계 텔레페리코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여서 사실 라파스에 별 기대가 없었다. 케이블카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걸 볼 때도 그러려니 했다. 어느 도시에나 케이블카 한두 대 정도는 있으니 흔한 관광상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 노선이 몇 개야? 하나, 둘, 셋… 무려 11개다. 라파스 사방에서 거미줄처럼 케이블카가 오간다. 그냥 케이블카가 아니다. 엄연한 도시 교통수단 텔레페리코(Teleferico)다.
라파스의 위성도시 엘알토는 라파스보다 더 높고(4150m) 인구도 90만 명으로 더 많다. 참고로 라파스 인구는 80만 명이다. 출퇴근시간 때면 두 도시를 오가는 차들로 도로가 거의 멈춰 있다시피 했다. 그래서 2014년 오스트리아 기술로 텔레페리코라는 케이블카 교통 시스템이 도입된다. 한 번 탈 때마다 3볼리비아노(500원)이니 말도 못 하게 저렴한 가격이다. 환승할 때마다 1볼리비아노씩 깎아 준다. 두 노선을 타면 6볼리비아노가 아니라 5볼리비아노란 얘기다.
텔레페리코는 기다리는 시간이 거의 없다. 연달아 오는 텔레페리코에 몸을 싣기만 하면 된다. 도시 전체를 휘젓고 다니는데, 총예산은 5000원. 1분마다 감탄이 나오고, 카메라를 찾게 되는 진풍경이다. 라파스는 솔직히 나만 알고 싶다. 괜히 알려져 전 세계인이 몰리면 물가만 비싸진다. 왜 사람들은 프랑스 파리나 미국 뉴욕처럼 유명한 도시만 찾을까? 덜 유명하다고 절대로 더 시시한 게 아닌데 말이다. 내게 라파스는 파리나 뉴욕 못지않은 매력 덩어리 도시다.
안전하게 다닌다면 최고의 골목여행지
라파스에서 가장 유명한 ‘마녀시장’에 가면 라마 태아를 말린 걸 볼 수 있다. 주렁주렁 여기저기 매달려 있어 처음엔 인형인 줄 알았다. 안데스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에게 바치는 제물로 쓰인다. 라마는 남미를 대표하는 낙타과 동물로 무거운 짐을 나르는 용도로 주로 쓰인다. 온순하지만 화가 나면 침을 뱉기도 한다. 볼리비아, 페루, 칠레 등지에 주로 서식한다.
볼리비아인은 대부분 가톨릭을 믿지만, 민간신앙 역시 큰 영향력이 있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물가가 저렴한 나라이기도 하다. 5000원만 있어도 식사에 간식, 커피까지 실컷 먹고 마실 수 있다. 볼리비아식 갈비탕인 ‘칼도 데 레스(Caldo de res)’는 단돈 2500원, 이발비도 3000원이면 충분하다.
남미는 다 좋은데 사실 치안이 별로다. 라파스에서도 소매치기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여권이나 큰돈은 숙소에 놔두고, 하루치 쓸 돈만 깆고 다니자. 강도를 만나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어디나 그렇듯 90%는 친절하고 정직하다. 라파스인도 그렇다. 물가가 저렴하고, 음식도 한국 입맛에 맞고, 풍경은 말도 못 하게 근사하다. 이런 도시는 절대 흔하지 않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듯이 용감한 자가 더 멋진 골목을 탐험한다. 라파스는 용기 있는 자들이 마침내 받게 되는 선물과도 같은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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