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육군

[TYS] 군인 아내로 산 19년…“이제 저도 군인 다 된 기분”

입력 2024. 12. 06   16:46
업데이트 2024. 12. 0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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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S (Thank You for your Service)
⑭ 육군미사일전략사령부 유대성 상사 <끝> 


‘남의 편’ 넘어 ‘국가의 편’
새벽에도 달려나가야 했던 남편
세 아이 육아 모두 내 몫이었지만
레바논 파병 끝내고 돌아오던 날
군인 가족으로서 받은 감동 ‘또렷’

아이들 꿈도 ‘국가의 편’ 
아빠의 용맹함 보고 자란 아들
고1이 된 지금도 장래희망 변함없어
바르고 무탈하게 자란 세 아이
부부가 힘낼 수 있는 원동력

우스갯소리로 ‘남편은 남의 편’이란 말이 있습니다. 결혼한 이후로는 내 편인 듯 내 편이 아닌 듯하다는 점에서 아내들이 하는 말이죠. 여기 한 군인의 아내는 남편을 ‘남의 편’을 넘어 ‘국가의 편’으로 내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를 이해한다고 합니다. TYS(Thank You for your Service) 열네 번째 주인공 육군미사일전략사령부 유대성 상사의 아내 김정화 씨의 이야기를 들어 봤습니다. 해당 글은 24-1차 자랑스러운 육군 가족상 수기 공모 입상작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정리=배지열 기자/사진=유대성 상사 제공

 

육군미사일전략사령부 유대성 상사와 아내 김정화 씨가 지난 5월 자랑스러운 육군 가족상 시상식에서 포즈를 취히고 있다.
육군미사일전략사령부 유대성 상사와 아내 김정화 씨가 지난 5월 자랑스러운 육군 가족상 시상식에서 포즈를 취히고 있다.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군인 남편 

유난히 많은 눈이 내리던 2004년 11월 26일, 육군부사관학교에서 열린 임관식에서 자랑스러운 하사 계급장을 단 그는 그로부터 5일 뒤인 12월 1일 유부남이라는 타이틀까지 달았습니다. 친구로 지내던 김정화 씨와 연인이 된 이후 하루빨리 부부의 연을 맺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김씨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과 떨어지기 싫어 부모님 허락을 받고 혼인신고를 먼저 했다”며 “생각해 보면 몇 개월을 기다리지 못하고 무엇이 그리 좋았는지… 어렸으니 가능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습니다.

문제는 낯설디낯선 환경. 20년 넘도록 도시에서만 살던 김씨는 남편의 부대 배치에 따라 강원도 화천군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서울에서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지 않은 듯했지만, 막상 가 보니 구불구불 산길을 지나야 해 엄청나게 멀고 힘들게만 느껴졌습니다.

또 한 번 김씨를 놀라게 한 건 남편의 소유권을 두고 싸워야 하는 상대가 바로 ‘국가’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남편의 상관인 통신중대장님을 만났는데 ‘남편은 제 것이 아니다’ ‘남편은 나라 소유’라고 하셔서 당황했다”며 “그때 ‘내가 좋아 결혼한 남편인데 왜 내 것이 아니지?’라고 반문했는데, 지금은 그런 말씀을 왜 하셨는지 이해한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존재’였습니다. 중대 가설반장이란 직책을 맡았던 유 상사는 주특기 특성상 비가 많이 내려 통신장비에 이상이 생기거나 낙뢰 등의 영향으로 중요한 통신에 문제가 발생하면 새벽에도 감시초소(GP)와 일반전초(GOP)에 출근해야 했습니다.

밖에서 작업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식사 때를 놓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함께 작업하는 병사들도 같이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아 유 상사가 ‘구조신호’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남동생이 3명이나 있었던 김씨는 병사들이 남동생 같아 더 챙겨 주고 싶고, 맛있게 먹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껴 식사 준비가 힘들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살뜰히 챙겨 준 덕분에 전역하고 지금까지 유 상사를 통해 연락을 전하는 예비역 병사가 많다고 합니다.

“그때는 당연한 줄 알고 살았습니다. 일하다가 끼니를 놓칠 때가 많았는데, 당시 월급으로는 매번 밥을 사 주기 힘들어 집으로 데려가 같이 식사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말도 안 된다며 다들 부러워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아내에게 무척 감사합니다.”


감사한 아내와 바르게 자라 준 아이들 

미사일사령부(현 미사일전략사령부)로 옮겨 간 남편을 따라간 곳에서 유 상사와 김씨 부부 두 사람이었던 가족은 어느새 5명으로 늘었습니다. 김씨는 “세 아이 육아로 바쁜 저를 도와주지 못하는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부대 생활에 적응하며 또 다른 통신장비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노력하는 신랑에게 잔소리할 순 없었다”고 그때를 떠올렸습니다.

그래도 아빠를 향한 아이들의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지상군페스티벌이 열리던 날, 김씨는 근무일이던 남편 대신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막내를 업은 채 행사장으로 향했습니다. 평소에도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던 둘째 아들은 그곳에서 대한민국 육군의 용맹스러움을 눈으로 확인하고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군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김씨의 ‘독박육아’는 이후로도 계속됐습니다. 레바논평화유지단(동명부대) 18진으로 선발된 유 상사. 파병 전 교육과 파병기간을 포함해 1년 가까이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아빠와 못 보는 것을 많이 힘들어하면서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습니다.

반가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명절을 맞아 해외파병 장병들의 모습을 담은 뉴스에 유 상사의 제기차기하는 모습이 나온 것입니다.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김씨와 아이들은 뉴스를 보면서 반가움에 활짝 웃었습니다. 그렇게라도 명절에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유 상사가 레바논에서 돌아오던 날, 김씨는 그날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행사장 강당 안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위풍당당함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저희 아들도 장성해 군인이 되면 꼭 한 번 도전해 보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힘들게 느껴졌던 그 시간이 더욱더 플러스가 돼 서로에게 감사하며 생활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직별을 바꾸면서 여러 보직과 부대를 옮겨 다닌 유 상사는 변화된 환경과 새로운 업무, 낯선 용어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안쓰러웠지만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익혀 나가는 남편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김씨.

그는 “남편이 목·허리·무릎 등 여러 차례 시술과 수술을 받았는데, 부대의 적극적인 배려로 진료여건을 보장받을 수 있어 고마운 마음이 크다”며 “항상 무리하지 말라는 제게 ‘내가 힘들어하면 주변에서 더 힘들어할 거야’라고 하는, 남다른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고 남편을 설명했습니다.

김씨는 이제 군인가족을 넘어 자신도 어느 정도 군인이 된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올해로 결혼 19년 차이지만, 앞으로 더 많은 날을 군인가족으로 지내면서 또 다른 우여곡절이 생길 겁니다. 하지만 저는 대한민국 육군 가족으로서 씩씩하게 헤쳐 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남편이 군인이면 군인가족도 반은 군인이란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남편 유 상사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퇴근하면 아이들을 안아 주긴 하는데, 사랑한다는 말은 하기 힘들다”고 토로하는 그.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아내는 20년 넘게 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가장 큰 존재입니다. 감사를 넘어 존경한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아무 사고 없이 바르게 자라 준 우리 아이들도 제 힘의 원동력입니다. 모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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