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 앞에서 커피를 주문한다
레귤러 사이즈에 휘핑크림 얹은 후
순서를 기다리면서 놓친 말을 곱씹는다
바닥에 가라앉은 시간마저 버리면서
멈출 수 없는 바퀴로 사는 나를 또 돌린다
안내된 문구를 따라 바코드를 찍는 오후
샷 추가된 피로가 종이컵에 쌓이는 동안
등 뒤의 모래시계도 쉼 없이 흘러간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그림자가 되어간다
<시 감상>
시인이 보여 주는, 커피를 주문하는 풍경은 언제부터인가 익숙한 일상으로 비친다. 우리는 키오스크와 마주 보며 “안내된 문구를 따라” “커피를 주문”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런 소통 관계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약봉지에 쓰여 있는 문구의 절차를 오차 없이 지키며 약을 먹는 것처럼.
시인이 쉽고 재치 있는 시어로 스케치하듯 보여 주는 풍경에는 ‘말’이 없다. 커피를 주문하는 화자는 사실 ‘말’하는 게 아니라 키오스크 시스템이 제시한 기표에 ‘클릭’으로 반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의지와 취향대로 “사이즈”와 “휘핑크림”을 얹을 순 있지만, 그 또한 키오스크 시스템이 제공하는 범위에서 가능하다. 이렇게 기술문명에 매몰돼 가는 ‘말’의 부재, ‘말’이 소외돼 가는 현상을 보여 주는 이 시는 전체가 하나의 은유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를 살펴보면, 시인은 여러 시에서 인공지능(AI), 모니터 등과 같은 시어를 즐겨 쓴다.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디지털 기술문명의 용어라 하겠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주창한 제4차 산업혁명은 물리적·생물학적 세계와 디지털 세계가 초연결·초융합·초지능화돼 창조하는 세상이다. 그 문턱을 겨우 넘어선 인류는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펼쳐질 미래의 역사를 가늠하기 어렵다.
가속페달을 밟으며 질주하는 디지털 물결에도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말에 그것이 반영된다. 시인은 그 변화에 주목한다. 모든 것이 시각화로 수렴(收斂)되는 디지털 세상에서 “놓친 말을 곱씹”어 보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 그림자가 되어” 가는 말을 성찰한다. 진정한 혁명은 말이 바뀌는 것이기에.
차용국 시인·문학평론가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