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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임금 마음에도 파도가 일렁였을까

입력 2024. 12. 05   15:58
업데이트 2024. 12. 05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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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예술 - 옛 그림으로 떠나는 여행 (17) 청간정(淸澗亭) 

강원도 동해안 ‘관동팔경’ 중 한 곳
청간역 왕래 여행객 묵어가는 건물
지금은 해안가 언덕 중턱으로 옮겨

김홍도·김응환, 어명 받고 영동 출장
대관령 동쪽 아홉 지역 돌며 스케치
유람 중 만난 강세황, 정밀한 묘사 극찬

청간정. 고성군 홈페이지
청간정. 고성군 홈페이지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 이십오(二十五).’

글씨 아래 연회색 먹빛으로 그은 수평선이 보인다. 그림 오른쪽 산비탈 아래 ‘ㄱ’ 모양으로 청간정과 만경루가 있다. 청간정 앞에는 층층이 쌓인 암벽 위로 소나무가 솟아 있다. 달빛을 감상하러 풍류객들이 오르던 ‘만경대(萬景臺)’다.

그림 오른쪽 아래로 ‘ㅁ’ 모양의 청간역 건물이 보이고, 청간리 마을과 어업을 생계로 하는 흔적인 그물과 덕장이 보인다. 길을 따라 일산(日傘)을 든 사람 뒤로 행렬이 이어진다. ‘U’자 형태의 청간 해변 해안선은 느슨하게 오른쪽 아야진항을 향한다. 저 멀리 배를 타고 노 젓는 어부들은 섬(현재 죽도)을 향한다.

먹선은 대강 그린 듯하지만 해안의 풍경과 주요한 공간, 사람들의 일상을 놓치지 않았다. 먹 한 줄 지평선으로 생긴 공간에는 바다의 푸른 빛과 파도 소리, 시원한 바람과 비릿한 바다 내음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유탄(柳炭)으로 밑그림도 그리지 않고, 붓으로 공간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누가 봐도 기량이 뛰어난 화가다. 바로 18세기 조선 화단을 이끈 김홍도 솜씨다. 

이 그림은 25번째 스케치이고, 26번째 스케치는 간성에 있는 가학정(駕鶴停)을 그렸다.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에는 장소와 번호가 적힌 풍경 스케치가 이 그림을 포함해 모두 서른두 장 있다.

하지만 스케치 화면의 숫자가 60까지 있어, 원래 60장 이상의 그림이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김홍도(1745~1806 이후), ‘청간정’, 『해동명산도첩 海東名山圖帖』, 1788년 이후, 종이에 먹, 30.5×40.3㎝,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1745~1806 이후), ‘청간정’, 『해동명산도첩 海東名山圖帖』, 1788년 이후, 종이에 먹, 30.5×40.3㎝, 국립중앙박물관

 

청간정 구역별 명칭
청간정 구역별 명칭

 


그날 만경대(萬景臺)에 올랐더니 소나무와 바위가 대를 형성하고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좌우에는 100호(戶)나 돼 보이는 어민들이 살고 있었다. 배는 끊임없이 오가고 숱한 갈매기가 날아들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또 달빛 어린 포구에 배를 띄우고 섬 바위 위에 앉아 어부에게 뱃노래를 시켜 듣고 있는데 가사가 모두 바람 걱정, 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백호(白湖) 윤휴(尹?)(1617~1680), 『백호전서』 34권 ‘풍악록(楓嶽錄)’ 임자년(1672년) 음력 8월 12일

그림보다 100여 년 전 이곳을 지나간 윤휴의 글에서 그림이 현장 그대로를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청간정’은 현재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 있다. ‘청간(靑澗)’은 맑은 시냇물을 뜻한다. 청간정 옆으로 설악산에서 발원해 흘러내리는 천진천(天津川)이 동해로 흘러간다. 예로부터 이곳은 관동팔경(關東八景·강원도 동해안의 손꼽히는 여덟 개의 명승지) 중 한 곳이다. 

관동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한 옛길 평해로(平海路)를 따라 고성과 양양 사이에 청간역(淸澗驛)이 있었다. 행정과 발령 때문에 이동하는 관리와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선비들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다. 이 때문에 역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하룻밤 묵어가는 객사(客舍) 기능을 하는 건물로 청간정을 활용했다. 지금처럼 언덕 중턱에 있는 정자 형태의 모습과 다르게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청간정은 만경루와 이어져 있으며, 사람들이 기거할 수 있게 누마루와 온돌방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김홍도는 어떻게 한양에서 이곳까지 왔을까? 이 여행에는 김응환(1742~1789)과 강세황(1713~1791)이 등장한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서로 각별한 사이의 도화서 화원으로 정조 임금이 가까이 두고 일을 시켰다. 1788년 정조는 김홍도와 김응환에게 영동지역을 그려오라고 명했다. 이에 김홍도와 김응환은 가을에 금강산을 비롯한 명승으로 알려진 대관령 동쪽의 아홉 지역을 다녔다. 그림 앞뒤로 스케치를 하며, 100여 폭 이상의 초본을 제작했다.

 

 

강세황, ‘청간정’,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1788년경, 32×47.9㎝,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청간정’,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1788년경, 32×47.9㎝, 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사정은 강세황의 문집에서 찾을 수 있다. 강세황은 1788년 금강산 유람 여정에 김응환과 김홍도를 만났고, 유람을 마치고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을 남겼다. 강세황은 김응환과 김홍도가 남긴 산천의 정밀한 묘사를 보고 칭찬한다.

“두 사람은 각기 장점을 발휘해 한 사람은 고상하고 웅건해 울창하고 빼어난 운치를 극진히 하였고, 한 사람은 아름답고 선명해 섬세하고 교묘한 자태를 다 살려내었다. ‘찰방 김홍도와 찰방 김응환을 전송하는 글’ 중에서, 『표암유고(豹菴遺稿) 』 

강세황은 둘의 행낭에서 그림을 찾으니 앞뒤로 모두 백여 폭의 그림이 나왔다고 기록한다. 두 화원은 강세황보다 먼저 서울로 떠났다. 강세황의 화첩인 ‘풍악장유첩’에는 강세황이 가보지 못한 삼척 죽서루(竹西樓)와 간성의 청간정, 가학정이 실려 있다. 아마 가보고 싶었는데 가지 못한 아쉬운 마음에 김홍도의 그림을 보고 옮겨 그린 듯하다. 그래서인지 김홍도의 그림과 비슷하다.

지금 청간정의 위치는 옛날과 다르게 해안가 언덕 중턱에 있다. 예전 청간정이 불에 타고 자리만 남자 1928년 토성면장 주도로 언덕 중턱에 세웠다. 그리고 다시 1953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동해안을 순시하며 제1군단장이던 이형근 장군에게 중수를 명령했다.

현재 만경대는 군사시설 보호구역 안에 있는데, 지금은 사라진 옛 청간정과 만경루가 있던 곳도 이 근방이었다. 

오랜 시간 이곳에 있던 건물과 사람, 시와 풍류는 기록으로 남았다. 오직 백사장과 푸른 바다만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김홍도와 김응환의 그림을 본 정조 임금은 시리도록 푸른 동해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 이 글은 2019년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진행한 ‘고성 청간정’ 전시자료와 도록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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