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시는 커피는 내가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수많은 원인의 연쇄적 작용에 의한 필연성으로 먹게 되는 것인가. 커피를 마시면서 나의 선택이 얼마나 작용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는 과연 어떤 원인으로 지금 나의 종교관으로 자리 잡게 됐을까? 이 믿음체계에 관한 질문은 오늘의 도덕적 선택에 분명한 영향을 미치므로 유효하다.
18세기 신학자였던 조너선 에드워즈는 인간 자유의 한계에 관해 영미권에서 100여 년간 철학적으로 반박하지 못한 강력한 논리를 제시했다. 외부의 강제 없이 자신이 보기에 좋다고 생각하거나 동의할 만한 것을 고르므로 분명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선택은 이전의 선험적 행습(Habit) 또는 경향성(Inclination)에 의해 자동적으로 결정돼 있다고 말한다. 지금 내린 선택은 ‘원인’이라는 역사가 쌓인 결과이며,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원인이 있기에 우리의 선택은 원인론적으로는 결정돼 있다는 것이다.
처음 맛봤던 하와이 코나커피를 잊지 못한다. 그 기억(원인)은 비슷한 맛을 다시 느끼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코나커피를 찾아보고 맛보는 경향성으로 작용한다. 종교활동을 할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했다는 응답을 많이 듣는다. 인생이 힘들 때 군대에서 처음 겪었던 평안해지는 체험이 생각나며, 이 기억(원인)은 다시금 그 경험을 할 수 있는 종교활동 장소로 이끈다. 어떤 이는 이를 통해 초월적인 체험을 한다. 커피로는 느낄 수 없는 경험을 맛본다. 최상의 커피를 맛보면 다른 것을 마시기 힘들어지듯 초월적인 체험은 일반적인 경험을 넘어 버려 더 이상 일반적인 맛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과연 이러한 종교적 선택에 나는 어떠한 자유를 갖고 있는가? 최초의 창조에 초월적인 경험을 하도록 내재된 경향성을 갖고 태어난 것인가? 또는 외부의 강제 없이 지금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택했으니 분명 나의 자유로 선택한 것이지 않은가?
최근 옥스퍼드대 인공지능(AI) 윤리 컬로퀴엄에서 머리 샤나한 박사는 AI의 신념, 의도, 욕구를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을 빌린 대언어 모델에 도입하는 방안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인간화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지만, 이미 신념체계를 도입한 것 자체가 인간과 같이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현재의 AI 윤리 논조는 AI에 윤리적 선택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론이 통신두절 시 알고리즘에 의해 사물을 찾아 공격하다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결국 이는 AI에 정교한 윤리적 체계가 필요하다는 의견으로 수렴된다. 윤리적 선택이 가능한 AI 무기체계가 도입될 수도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AI에도 그들이 보기에 좋은 것과 동의할 만한 것을 선택하는 자유가 주어지는 셈이다. 우리의 경향성은 알고리즘으로 대체되고 인간과 같은 책임성이 부여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과 AI가 지니는 자유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는 점점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주관적인 일반 경험과 종교적 초월 경험을 결코 대체할 순 없으리라. 자유와 AI는 우리 모두의 종교와 삶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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