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연·뮤·클 이야기

황홀하지만 애잔한 모험…이번이 마지막 항해라니

입력 2024. 12. 03   16:44
업데이트 2024. 12. 03   16:47
0 댓글

연·뮤·클 이야기 - 백 투 더 스테이지-뮤지컬 ‘해적’

아버지 유품 보물지도 발견하고
루이스와 선장 잭 여정 담은 2인극
등장인물은 4인…2명이 1인 2역
남자·여자 배우 버전으로 나눠 공연
대학로 뮤지컬 문법 3형식으로 바꾼
작가 이희준·작곡 박정아 콤비 작품
스타일리시한 연출·술맛 당기는 넘버
고정 팬들 눈빛, 시작부터 아련해져

 

뮤지컬 ‘해적’의 한 장면. 사진=콘텐츠플래닝
뮤지컬 ‘해적’의 한 장면. 사진=콘텐츠플래닝

 


“그곳에 해적들이 있었다!” 첫 대사부터 맛있다. 이 작품은 2인극. 정우연·임예진 두 배우가 해적 ‘잭’과 화자인 ‘루이스’로 분한 첫 장면을 보자마자 딱 떠올랐다. “어럽쇼, 이거… 정년이하고 허영서 같은데?”

뮤지컬 ‘해적’은 가볍게 볼 수 있지만, 무겁게 보자면 한없이 무겁게 볼 수도 있는 희한한 작품이다. 대학로 뮤지컬 문법의 ‘5형식’을 ‘3형식’으로 바꾸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이희준 작가, 박정아 작곡가 콤비의 냄새가 두 번 뿌린 페브리즈처럼 노골적이다. 여기에 박지혜 연출의 손맛이 더해지면서 ‘해적’은 두툼한 마니아층을 거느리며 대학로란 이름의 바다를 순항 중이다.

극 중 언급으로만 등장하는 캐릭터(갑판장 하워드)를 제외하면 총 4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공평하게 1명이 2역씩 담당한다. 화자이자 작가 지망생 루이스는 총잡이 ‘앤’, 해적 선장 잭은 검투사 ‘메리’를 연기한다.

‘해적’의 캐스팅이 재미있는 점은 남자 배우 출연일과 여자 배우 출연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남자 배우 출연날에는 2명의 남자 배우가 앤과 메리를, 여자 배우 출연날에는 2명의 여자 배우가 남자 캐릭터인 루이스와 잭을 연기하는 식이다. 이러다 보니 루이스와 앤, 잭과 메리가 동시에 등장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루이스는 소설가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 은근히 자주 등장하는 앵무새 빅토리아와 항구 마을에 살면서 해적 이야기를 쓰고 있다. 루이스의 아버지 케일럽은 해적이었지만 얼마 전 죽었다. 해적 선장 잭이 동료이자 부하였던 케일럽을 찾아오면서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두 사람은 케일럽이 남긴 유품 중 해골 표시가 그려진 장미 그림(물론 보물지도다)을 발견하고 우여곡절 끝에 보물섬 로즈아일랜드를 향한 모험을 떠나게 된다.

또 다른 캐릭터인 앤은 정박한 항구의 술집 주인이었지만, 잭과 사격 내기에서 이겨 해적선에 승선하게 된다. 이어 경쟁 해적선과 전투 끝에 사로잡아 온 검투사 마르코(사실은 메리다)도 합류한다. ‘해적’은 보물을 찾으러 가는 모험의 여정과 캐릭터 4명의 개인사가 절묘하게 뒤섞인 뮤지컬이다.

 

 

뮤지컬 ‘해적’의 한 장면. 사진=콘텐츠플래닝
뮤지컬 ‘해적’의 한 장면. 사진=콘텐츠플래닝



2인극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무대의 빈자리는 음악이 채워 줘야 한다. 넘버도 좋고, 툭툭 이어 붙인 것 같은데 이게 또 대단히 스타일리시해져 버리는 연출도 참 좋다.

‘스텔라 마리스(Stella Maris)’는 앤이 잭에게 “총 좀 쏴 볼까?” 하며 허공에 총을 쏴 별을 깨뜨리는 장면에 나오는 넘버다. 앤과 메리가 칼싸움을 벌이다가 뜨거운 눈길이 오가는 ‘첫눈에 반해(Love At First Sight)’도 좋아하는 넘버. 서로 죽일 듯 싸우다가 마지막에 앤과 메리가 부르는 “내가 심장을 토하기 전에 내 심장을 찔러다오”라는 가사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처럼 들린다. 해적들이 술집에서 떼창하는 ‘해적 노동요’도 럼주 냄새가 물씬 풍긴다. 뮤지컬 ‘빨래’의 ‘자, 건배’ 이후 오랜만에 만난 술맛 당기는 넘버다.

임예진 ‘루이스(앤)’와 정우연 ‘잭(메리)’을 관람했다. 임예진은 ‘빠리빵집’이란 작품에서 인상 깊었던 배우다. 적당히 긴장한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가 차돌처럼 단단한데, 대단히 아름다운 떨림을 갖고 있다. 요즘은 이런 스타일로 노래하는 배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외모는 드라마 주연급.

정우연은 처음 봤는데 깜짝 놀랐다. 그가 맡은 해적 선장 잭과 검투사 마르코(메리)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둘 다 매력적이다. 오래 보고 싶은 배우다.

극이 끝으로 가면서 색감이 확 달라져 ‘어떻게 마무리하려나’ 싶었는데, 연출의 선택은 아니나 다를까 수미상관. 멋지고, 황홀했고, 두려웠고, 비참했던 모험을 마친 루이스는 항구의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만난 해적들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남긴 항해일지를 마저 써 나간다. 이 엔딩이 애잔하고 여운이 길다.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은 그렇게 ‘해적의 황금시대’라는 노래로 열고 닫힌다. 루이스의 첫 대사, 첫 넘버(해적의 황금시대)부터 재관람 관객들의 눈이 가늘어지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마지막으로 안타까운 소식. 제작사가 이번 4연을 끝으로 더 이상 이 작품을 만들 계획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시즌이 해적의 마지막 항해인 셈이다. 실제로 이번 뮤지컬 ‘해적’ 타이틀 옆에는 ‘THE LAST VOYAGE(마지막 항해)’가 붙어 있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