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패션의 역사

군복, 유니폼이 아니다…걸치는 순간 영웅이 된다 

입력 2024. 12. 02   16:46
업데이트 2024. 12. 02   17:33
0 댓글

패션의 역사 - 군복의 역사 <1>

동서양 막론 지리·문화·생활상 깃들어
판갑·찰갑 갑옷, 귀족·군 지도자 착용
강인함과 질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임진왜란 당시 상급 수군들의 군복.
임진왜란 당시 상급 수군들의 군복.

 

이른 오후 한 청년이 망설이는 얼굴로 옷장에서 디지털 패턴이 그려진 옷가지를 꺼냈다. 오른쪽 어깨엔 태극기가, 왼쪽 어깨엔 상징적인 도안이 그려져 있는 벨크로(찍찍이)가 부착돼 있다. 환복(換服)은 빨랐다. 그렇게 ‘군복’을 입고 문밖을 나서는 청년은 나라와 가족을 지키는 군인이다. 그 얼굴에서 더 이상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다. 씩씩하게 휴가를 마무리하고 부대로 복귀하는 군인의 모습이다. 군복은 망설이던 청년을 어떻게 다시 씩씩한 군인으로 되돌려 놨을까? 군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군인이 가진 정체성, 전술적 필요성, 패러다임 변화 등 다양한 요소를 반영한다. 관찰해 보면 그것을 입은 군인의 복무 자세와 맡은 임무가 요구하는 전술적 필요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본 기고문에선 이러한 군복이 걸어온 역사를 살펴보면서 세계 각 지역·나라들이 군복을 통해 보여 준 지리·문화적 차이와 사회·군사적 환경 변화를 알아보려 한다. 동양과 서양이 거쳐 온 시대 변화가 하나하나 전부 대응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에선 시대를 통상 기준대로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순으로 나누되 오직 유럽 중심적 관계사만을 설명하기 위한 도식이 아닌 군사 영역을 둘러싼 전반적 변화를 기준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또한 모든 나라가 동일한 시점에 모두 같은 시대를 보내진 못했다. 한 나라가 근대식 군대를 구성할 즈음 다른 국가에선 아직 고대나 중세 같은 이전 시대 군대를 갖추기도 했기에 모든 나라가 같은 시간과 개념 양식을 군복에 반영하지 못한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가장 먼저 알아볼 고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온갖 자연환경에 휩쓸리며 기술적 한계에 크게 영향받았던 시대다. 이때 군복이라고 불리던 옷가지는 제복이었음에도 제복이라기보다 지리나 문화권, 군영 밖 사회적 신분 등에 따른 생활상을 알아보는 표징에 가까웠다.
드넓은 평야지대와 산악지대가 혼재된 지형이 대부분이었던 옛 중국엔 방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전투가 빈번했다. 특히 중원으로 일컬어지던 평야지대에선 대규모 보병과 기병 전투가 주를 이뤘다. 이는 지정학적으로 중원과 서융 땅 사이에 끼어 있던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군인들이 신체를 보호할 필요성을 높여 찰갑(札甲·비늘 모양 갑옷)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북변 유목민을 요격하고 산둥 방향에서 침입해 오는 제후와 맞서며, 나아가 그들을 정복하는 전쟁에서 기동전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유연성과 방어력을 동시에 갖춘 갑옷이 장병 사이에서 중시됐다. 다만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갑옷은 기술적 한계로 당시 양산(量産)이 어려웠다. 각종 문헌과 오늘날 중국 시안에서 발견된 병마용은 이 시대 군복이 문화적으로 선조 때부터 검은색을 선호했던 전통복식과 정치·사회적으로 법가적 정치사상에 영향을 받아 열악한 기술적 환경에도 규격화를 추구한 도포·갑옷이 주를 이뤘음을 말해 준다. 국난이 끊이지 않았던 긴 시간을 존속해 온 진나라는 그 시대를 살아간 순자 등의 인물이 남긴 문헌에서 군국화가 상당히 진행돼 있었고, 그만큼 제복을 입고 사회의 여러 어려움을 해결하는 자들이 범국민적 존경을 받은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시안에서 출토된 진나라 위관 병마용.
중국 시안에서 출토된 진나라 위관 병마용.

 

신라 찰갑 복원 모형. 출처=KBS
신라 찰갑 복원 모형. 출처=KBS

 

527년 지방태수 이와이의 난 당시의 일본 갑옷을 묘사한 삽화.
527년 지방태수 이와이의 난 당시의 일본 갑옷을 묘사한 삽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반도 통합을 이룬 신라는 초기엔 판갑(板甲)을 주로 착용했던 흔적이 각종 고고학적 발굴로 알려졌다. 기다란 금속판을 이어붙인 이 갑옷은 전투에서 중요한 방어수단으로, 주로 귀족 계급이나 군사지도자들이 착용했다. 동남쪽에 치우친 지리적 위치로 인해 비교적 방어에 유리한 산악지형을 활용했지만,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 방면 경계를 위해 기동성·방어력을 겸비한 갑옷이 필요했다. 판갑은 이러한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했다. 판갑은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들고, 수리와 보수가 용이해 병사들에게 보급하기 적합했다. 신라는 점차 중앙집권화를 이루며 군사력 강화정책을 펼쳤다. 판갑은 조직적인 대규모 병력 표준화를 위해 적합한 선택이었다. 또한 당시 화랑도와 같은 군사조직 역할이 커지면서 군복의 실용성·효율성이 강조됐다. 이후 고구려 등 주변국과 전쟁과 교류를 거듭하며 찰갑을 도입하게 됐다.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룬 시대에 이르자 신라는 넓어진 영토와 다양한 지형을 아우르는 전술이 필요해졌고, 찰갑은 유연성·기동성이 뛰어나 여러 전장환경에 적합했기에 지속적으로 쓰였다. 신라는 당(唐)나라와 외교·군사 영역에서 협력·대치과정을 거치면서 찰갑 제작기술·디자인이 무르익었다. 찰갑은 신라의 군사조직 선진화와 강력한 중앙통치력을 상징하는 요소로, 군복의 표준화·효율성을 추구한 디자인의 경우 백성들에게 국가의 질서와 보호를 보장하는 신뢰감을 심어 줬다. 외래 기술을 적극 받아들이면서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이 갑옷은 통일신라가 내세울 수 있는 문화적 자부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옛 일본에선 선사시대부터 가죽으로 만든 혁갑(革甲)과 나무로 만든 목갑(木甲)이 쓰였다. 이때 생긴 형식은 야마토 왕권이 번영한 고훈시대에 이르러 단갑(短甲)이 됐다. 주로 귀족과 무사 계급이 입던 단갑은 작은 나뭇조각이나 가죽 조각을 엮어 만들었다. 경량이면서도 유연성이 있었다. 이러한 갑옷은 전투에서의 보호 기능과 함께 사회적 계급과 권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이후 백제와 신라, 가야(伽耶)와 교류하면서 전래된 찰갑이 괘갑(掛甲)으로 불리며 도입됐다. 주변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열도 중심에 자리한 야마토 왕권은 외부 침입과 인근 군도를 장악한 세력에 대비한 방비가 중요했고, 괘갑의 견고함이 적합했다. 당시 괘갑을 입은 군인은 왕의 위엄을 대변하는 존재로, 중앙권력의 권위와 직결돼 각종 공무를 수행했다.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충성스러운 전사이자 나라를 지키는 용맹한 수호자로 여겨졌다. 옛 일본에서 괘갑은 제작비용이 높아 특정 전사 계층만 착용이 가능했기에 점차 상위 계급의 특권·위세를 드러내는 상징으로도 인식됐다. 

옛 로마는 크게 로마공화국과 로마제국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공화국 시기에는 전장과 무관하게 병사 개인의 장비 구매 능력에 따라 군복이 달라졌고, 주로 그리스에서 영향을 받은 청동 흉갑인 ‘로리카 무스쿨라타(Lorica Musculata)’나 철제 사슬 갑옷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가 채용됐다. 제국 시기엔 육상과 해상을 아우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켜야 했다. 이때 병력이 갖춰야 할 통일성과 전술적 효율성을 가시적으로 강조하고자 표준화가 쉬운 철제 판갑 ‘로리카 세그멘타타(Lorica Segmentata)’가 등장했다. 이 갑옷은 금속판을 연결해 기동성·방어력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 특징이었다. 공화정시대와 제정시대를 막론하고 로마에선 군복을 입은 군인이 시민사회를 수호하는 첨병이자 로마의 질서와 확장을 상징하는 영웅적 존재로 존경받았다. 제국이 몰락기에 들어설 후기 즈음엔 군대가 정치적 갈등의 중심이 되며 양가적 시선도 존재했으나 전체적으로 군복은 로마 시민사회가 보여 주는 강인함과 질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