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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 결혼, 관계의 최적화? 트렁크 열어보니 사랑이 보이네

입력 2024. 12. 02   17:23
업데이트 2024. 12. 0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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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의 연구소(연예를 구독하소)
‘트렁크’가 던진 메시지,  인간관계, 계약으로 대체될까요?


데이터 통해 매칭된 두 사람
1년 기한 결혼, 예측 못한 방향으로…
스스로 억눌렀던 감정·결핍 마주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관계 의미 되새겨
낭만적 사랑 계속되진 않지만
지루한 듯 익숙하고 뻔하지만 안정된
웃고 싸우고 화해하며 늙어가는
결혼의 본질 다시 생각하게 해

 

‘트렁크’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트렁크’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한 백 살쯤 산다치고, 나랑만 사는 거 지겨울 것 같지 않아?” 넷플릭스 시리즈 ‘트렁크’ 속 서도하(이기우)의 대사는 결혼제도의 본질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수명이 길어지고 개인주의가 확산한 오늘날, 결혼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다. 비혼이 하나의 사회적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금, 평생 한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트렁크’는 이런 질문을 통해 현대인의 관계와 소통방식을 새롭게 탐구하며, 결혼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작품 속 ‘NM(New Marriage)’은 1년간의 기간제 결혼 서비스를 제공하는 매칭업체다. NM의 서비스는 결혼을 감정의 영역이 아닌 필요와 기능으로 치환하며, 관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사회 흐름을 반영한다. 이는 허황된 공상과학(SF)적 가정이 아니다. 소비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맞춤형 광고를 제공받고, 알고리즘에 따라 취향을 추천받는 지금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인간관계, 심지어 결혼마저도 데이터화하고 최적화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한 걸까? NM은 이 가능성을 시험하며 현대사회의 욕망과 두려움을 비추는 거울로 작용한다.

NM의 서비스는 관계의 복잡성을 단순화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준다. “사랑조차 관리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게 될까?”라는 질문은 단순히 흥미로운 상상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은 사랑과 결혼의 본질이 효율과 편리함으로 치환될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관한 딜레마를 날카롭게 제기한다.

하지만 NM의 서비스가 제시하는 효율성과 편리함은 결혼의 본질과 부딪히는 순간, 그 한계를 드러낸다. 결혼은 데이터와 매뉴얼로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사랑과 관계는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복잡성 속에서 피어난다. 이는 어떤 시스템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트렁크’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트렁크’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작품 속 주인공 노인지(서현진)는 NM사의 차장으로, 음악 프로듀서 한정원(공유)을 5번째 남편으로 맞이한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이를 직업으로 삼은 노인지는 계약 조건에 충실하며 감정을 배제하려 한다. 한정원은 전 아내 이서연(정윤하)의 요구로 마지못해 기간제 결혼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과거의 실패에서 비롯된 불신은 그를 결혼이란 관계에 더욱 냉소적이고 회의적 인물로 만든다.

그들의 만남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처음엔 무미건조했던 관계 속에서 한정원은 노인지와 함께하며 조금씩 내면의 평화를 느끼고, 노인지는 그의 일상에 따뜻함을 불어넣는다. 이 과정에서 노인지는 자신이 억눌렀던 감정과 결핍을 마주하고, 한정원 역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한정원이 노인지와의 일상에서 처음으로 안정을 찾는 장면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단순한 계약 이상의 감정적 연대를 필요로 함을 강렬하게 암시한다.

‘트렁크’는 단순히 결혼의 형태를 논하지 않는다. 각각의 인물은 각자의 결핍과 상처를 안고 있으며, 관계 속에서 이를 채우려 한다. 노인지와 한정원이 서로에게 동화하며 변화하는 모습은 결혼이 단순한 계약이 아닌 감정적 연결임을 보여 준다.

이서연과 윤지오(조이건)의 관계는 진정성과 계약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복잡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들이 맺는 연결고리는 한편으론 제도적 틀 안에 갇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적 갈망으로 불완전하다. 이들은 결혼의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상징하는 듯하다.

결국 ‘트렁크’는 결혼을 인간관계의 거울로 삼아 사랑과 구원의 본질을 조명한다. 기간제 결혼이란 설정은 결혼이 단순히 의무와 제도에 의해 지속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NM의 매뉴얼은 관계의 외형적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연결과 변화는 매뉴얼의 통제를 넘어선다. 이는 결혼이 결국 사람과 사람 간의 진정한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호숫가에 떠오른 트렁크 역시 단순한 스릴러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결혼이란 제도가 품은 이상과 현실, 그 사이에서 우리가 외면해 온 감정적 진실을 은유한다. 마치 물속에 가라앉아 있던 트렁크가 표면 위로 떠오르며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듯이 작품은 사랑과 결혼의 본질이 표면 아래 감춰져 있음을 암시한다. 한정원과 노인지의 관계가 계약의 경계를 넘어 변화하듯, 트렁크는 관계 속에서 마주해야 할 감정의 심연과 결혼의 본질을 다시금 묻는다.

작품 후반부에 한정원이 노인지에게 넌지시 털어놓는 바람은 ‘트렁크’의 메시지를 집약한다. “(20년 후의) 우리는 너무 뻔해 지긋지긋해요.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툴툴대다가 저녁으로 생선을 구워 먹고, 같이 곯아떨어지고, 그다음 날도 뻔하게 일어나요.” 한정원이 꿈꾸는 결혼은 낭만적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지루하지만 익숙하고, 뻔하지만 안정적인 관계다. 뻔한 일상 속에서 함께 웃고 싸우고 화해하며 늙어 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란 그의 깨달음은 결혼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결혼은 개인의 외로움을 달래거나 사회적 기대를 충족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트렁크’는 사랑과 결혼의 본질을 묻는다. 뜨겁고 낭만적으로 시작된 결혼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상에서 피어나는 안정감과 따뜻함이야말로 결혼이 품은 진정한 가치다. 특별함이 아닌 평범함을 받아들이며 지루한 날을 함께 쌓아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과 결혼의 본질이 아닐까.

 

필자 박현민은 신문사·방송사·잡지사를 다니며 콘텐츠와 관련된 일을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평가위원 및 자문위원이며, 『K-콘텐츠로 보는 현대사회』 등 4권의 책을 썼다.
필자 박현민은 신문사·방송사·잡지사를 다니며 콘텐츠와 관련된 일을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평가위원 및 자문위원이며, 『K-콘텐츠로 보는 현대사회』 등 4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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