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32. 2013년 남수단 한빛부대와 유엔 인도·파키스탄 정전감시단 <1>
출발 앞두고 급하게 황열병 예방접종
부작용으로 생긴 근육통에 며칠 앓아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산 보며
비행기 안서 언젠가는 가보리라 다짐
석양은 감탄사 나올 정도로 아름다워
호텔 방엔 작은 도마뱀들이 돌아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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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열병(yellow fever)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프리카나 남미의 열대지역에서 모기가 전파하는 바이러스성 감염이다. 중증일 경우 치사율이 50%에 이를 정도로 무섭다. 그 때문에 2013년 남수단재건지원단(한빛부대)에 가게 됐을 때 당부사항이 황열병 예방접종을 반드시 하라는 것이었다. 접종증명서가 없으면 입국에 지장이 있다면서.
황열병 접종은 늦어도 출국 1주일 전에는 마쳐야 했다. 항체가 생길 시간이 필요해서다. 그렇다고 아무 병원에서나 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공인 예방접종 지정기관에서만 할 수 있다. 출국 10여 일을 앞두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국립의료원에 전화했다. 그런데 재고가 없다고 한다. 예약도 안 되고.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다급해졌다. 여기저기 연락하느라 전화기에 불이 났다. 다행히 한 군데에서 이틀 뒤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인천국제공항 검역소다. 때아니게 공항에 행차해야 했지만, 겨우 한숨 돌렸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에 여유를 부리다 큰코다칠 뻔했다. 역시 준비는 미리미리 해야 한다. 예방접종 부작용으로 근육통이 생겨 며칠 끙끙 앓은 것은 그것을 지키지 못해 받은 벌인 듯하다.
이러한 사연을 안고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케냐 나이로비공항에 도착한 것은 7월 9일 새벽 5시였다. 13시간 40분간의 비행. 힘들었지만 대한항공 직항이 있어 편하게 온 셈이다. 여기서 환승해 남수단의 수도 주바로 이동해야 한다.
주바행 항공기에 짐을 부치고 탑승 수속을 하려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가 갖고 있던 서류로는 입국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공무를 위한 관용여권 소지자는 통과할 수 있다. 우리 일행 16명 중 관용여권은 나를 포함해 4명, 나머지 12명은 일반여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미 짐을 부쳤기에 누군가는 가서 챙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잠시 논의 끝에 나와 장교 2명이 먼저 떠나기로 했다. 비행 도중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은 산을 만났다. 아프리카 최고봉이라는 킬리만자로산이다. 높이 5895m. 적도에서 유일하게 만년설을 볼 수 있는 트레킹 코스가 저기 있다는데. 언젠가는 가보리라 다짐하며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조용히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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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바공항 상공에 도착했다. 그런데 항공기가 계속 선회한다. 문득 합동참모본부(합참) 관계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테러 첩보가 입수돼 오늘은 호텔에서 보내고, 내일 보르로 떠나기로 했다는. 설마 나이로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지.
초조했던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항공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이유는 나중에 알았다. 남수단 독립 2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인근 우간다·짐바브웨의 정상급 인사 방문 때문에 착륙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이다.
활주로 건너편에 마중 나온 한빛부대 장병들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몇몇은 잘 알고 있던 얼굴. 활주로를 가로질러 인사를 하려는데, 마이크 타이슨 같은 우람한 사람들이 에워싸며 뭐라고 말을 한다. 우리로 치면 대통령실 경호처 소속이다. 어떤 영문인지 모르는 위압된 분위기에서 순간 얼음이 됐다. 다행히 한빛부대 장병들이 해명해줘 오해는 풀렸다. 계속해서 도착하는 주요 인사 경호에 신경이 곤두섰는데 갑자기 웬 이방인이 튀어 나왔으니, 그들도 당황하고 놀랄 수밖에. 테러 용의자로 봐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자칫하면 잡혀가 조사를 받을 수도 있었다. 한빛부대 장병들이 손을 흔든 것도 오지 말라는 표시였다. 주의만 받는 걸로 끝났지만, 그런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나이로비에 남아 있던 일행도 다음 항공기를 타고 오후 2시30분쯤 무사히 도착했다. 대사관에서 공적인 업무 때문에 온 것으로 보증해준 덕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주바에 먼저 도착한 우리가 챙긴 짐은 2개에 불과했다. 합참 정훈공보실장과 내 짐뿐이었다. 나머지 짐은 후속 항공기에 실려 왔다. 짐작건대 어차피 주바로 가는 짐이니 순서에 상관없이 자기들 편의대로 실은 것 같았다. 일행이 같은 항공기로 함께 왔다면 짐 때문에 또 기다려야 했을 터. ‘그래, 이런 일이 있어야 여행이지. 너무 순조로우면 추억도 없는 법’이라며 마음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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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인 주바 그랜드호텔은 염려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방에 들어가니 작은 도마뱀들이 분주히 벽을 타며 나를 맞아줬다. 누군가는 귀엽다고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야외수영장에 몸을 던지고, 저녁식사까지 끝내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아프리카의 석양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출국 3일째인 10일. 드디어 한빛부대가 있는 보르시로 출발했다. 주바에서 보르까지는 약 200㎞. 민간인과 유엔이 사용하는 공항은 서로 다른 곳에 있다. 탑승권을 받고 유엔 헬기에 올랐다. 러시아제 Mi-8 헬기. 24명의 승객이 탈 수 있는 다목적 헬기다. 탑승권은 내릴 때 반납해야 한다. 아쉬웠다. 소장품이 하나 더 생길 기회였는데.
보르공항에 도착하니 보르시장과 한빛부대장이 반갑게 맞아줬다. 남수단은 10개의 주로 이뤄져 있다. 보르는 종글레이주의 주도다. 인사를 마치고 대기 중인 버스에 탔다. 한국에서 남수단 보르까지 거리는 약 1만2000㎞. 헬기를 포함해 항공기를 3회 탑승했고, 고생고생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고생 끝에 낙이라는데. 그럼, 이제는 즐거움(樂)만 남은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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