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 선혜청 청내장, 남대문시장 전신
성리학 예법상 청와대 터가 시장
자리 마땅치 않아 성문 앞에 열어
임진왜란 거치며 우후죽순 ‘난전’
‘난장’이라 부를 정도로 무질서해
미곡관리 선혜청 현재 모습 영향
점포 없는 상인 돗자리 받아 장사
6·25 이후엔 도깨비시장 별명도
북새통 속 억척스럽게 삶 이어와
도시를 뜻하는 ‘성시(城市)’는 성문 바깥에 시장을 둔 데서 유래했다. 성(城)과 시장이 합쳐져 주거 공간을 구성했다. 조선은 도성을 설계하면서 성리학의 예를 좇아 법궁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엔 사직을 배치하는 ‘좌조우사(左祖右社)’와 앞에는 조정, 뒤에는 시장을 두는 ‘전조후시(前朝後市)’를 취했다. 그러나 경복궁 북쪽인 신무문 밖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시장을 두기가 마땅치 않아 남대문 바깥을 택했다. 후조전시(後朝前市)이자 ‘문전성시(門前成市)’였다. 숭례문 입구 바깥에서 곡물과 채소, 어물이 취급됐다. 남대문로와 회현동 일대였다. 건국 초기인 1414년부터 정부 임대전 형식으로 문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 도성 중심에 관립상가도 들어섰다.
태종이 종로대로 양측에 정부 소유의 가게들을 배치해 시전(市廛)을 조성했다. 공가(公家)에 거래를 맡긴 데서 정부가 시장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시전은 비단을 비롯해 무명·명주·어물·종이·모시·면포 등 여섯 품목을 취급해 ‘육의전(六矣廛)’이라고 불렀다. 옷감과 직조물 가게의 규모가 컸다. 어물은 남대문시장 어물전과 구별해 내어물전으로 불렀다(『만기요람』). 육의전은 왕족과 정부가 이용하는 어용상점이었다.
정부는 의식에 필요한 물목들을 이곳에서 구입했다. 상점들은 은(銀)을 유통 수단으로 삼아 명·청에서 물품을 구입해 왔다. 이 육의전은 국역(國役)을 담당했다. ‘국역’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비용을 부담한다’는 뜻으로, 정부가 시전 중 실한 37곳의 ‘13 상전(十三床廛)’을 뽑아 분수를 정해 부담케 한 일종의 조세제도였다.
정부의 토목과 건축 외에 관리들의 출장비도 충당했다. 예를 들어 연경에 가는 사신 비용은 모전(모자가게)에서 받은 세금으로 해결했다. 이 ‘모세(帽稅)’를 줄여 공비 조달이 되지 않자 정조 즉위년에 재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다(『정조실록』 5년 1월 17일). 국역은 정부가 10등급으로 나눠 매김했는데 가장 이문이 컸던 비단이 10분을 담당했다. 무명이 9분, 명주가 8분, 종이가 7분, 모시가 6분, 면포가 5분 그리고 어물이 4분이었다. 지금의 청진동 일대에서 말총·가죽·초·꿀 등의 잡물을 취급하던 ‘망문상전(望門床廛)’도 3분을 맡았다(『증보문헌비고』). 국역을 떠안은 유분전(有分廛)은 관립상가여서 은이 귀해져 수입하지 못하면 국가가 보유 은을 빌려줬다. 모전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는 구제책도 폈다(『정조실록』 5년 11월 14). 영조 때도 은 1만 냥의 관은(官銀)을 푼 적이 있다(『영조실록』 35년·40년). 국역을 부담하는 육의전에 혜택을 주기 위해 정부가 도성 안에 다른 시장을 세우지 못하도록 ‘금난전권(禁亂廛權)’ 제도도 뒀다(『증보문헌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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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시장인 남대문시장의 발흥은 종로 관립상가의 몰락과 궤를 같이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혼란기에 생계를 이으려는 사람들이 날품팔이에 나서 난전(亂廛)을 형성한 까닭이었다. 이는 금난전권 제도의 유명무실화를 의미했다.
정조 5년 비변사는 “육의전이 난전의 폐단 때문에 갈수록 이윤을 내지 못해 지탱하기 어렵다”고 보고했다(『정조실록』 5년 1월 17일). 도축이 마음대로 행해지면서 기존 현방(懸房·정육점) 상인들이 도산 지경에 빠졌다. 난전의 폐해가 커지자 정조 때 어물전 시민(상인) 오수빈 등은 육의전으로 복귀하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정조실록』 24년 1월 19일). 도성 곳곳에 들어선 난전은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지 못한 가게들이어서 비공식적인 ‘가가(假家)’로 취급됐다.
그 수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자 난전은 ‘난장(亂場)’으로 부를 정도로 무질서해졌다. ‘난장판’이라는 말이 이때 생겨났다. 좋은 목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 난전의 결과로 ‘배오개(梨峴·배고개)장’과 ‘칠패(七牌)장’이 생겨났다. 배오개는 종로 4가와 청계천 사이였고, 칠패는 도성의 군영제도에 따른 구획으로, 지금의 남대문과 중구에 해당한다(『서울지명사전』). 용산·마포·서강 등을 통해 들어온 물류가 모이는 거점이었다. “칠패에는 온갖 생선이 다 있구나”라고 읊은 ‘한양가(漢陽歌)’ 대목에서도 그 활기가 확인된다.
수요와 공급이 만나 조성되는 자유시장은 관립 상가를 몰락시켰다. 청계천 4가의 ‘배오개다리’와 중구 중림동의 ‘칠패로’라는 거리명으로 각각 흔적을 남겼다.
1608년부터 남대문 바로 옆에 자리 잡았던 선혜청의 존재는 현 남대문시장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광해군이 실시한 대동법에 따라 진상품이 특산물에서 쌀로 대체되면서 선혜청이 그 출납을 맡았다. 관아의 비용과 관리 녹봉이 쌀로 지급됐고, 관리들은 쌀을 어물과 채소, 옷감 등으로 바꾸었다. 선혜청 미곡창고 앞 청내장(廳內場)이 섰던 곳은 도소매상을 비롯해 주막과 중개상이 들어서 번잡해졌다. 지금의 남대문시장 ‘갈치조림 골목’이다.
점포를 소유하지 못한 ‘가가(假家)’ 상인들은 선혜청에서 지급하는 행보석(行步席·돗자리)을 받아 장사에 나섰다(『도청의궤』). 이 돗자리에서 좌판을 뜻하는 ‘도떼기’라는 말이 파생했다.
19세기 선혜청 창고는 기능을 잃어 비어 있었는데 1896년 박정양 내각 때 단행된 한성 도로개수 때문에 쫓겨난 길거리 상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새로운 상권을 형성했다. 새 시장 세력이 커지자 배오개장과 칠패장 가게들도 옮겨왔다. 남대문시장이 이렇게 탄생했다.
일본 상인들이 주도했던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이후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화·군복 등 군수품과 통조림, 일본에서 밀반입된 화장품과 시계, 전자제품 등 밀수품이 거래되면서 ‘도깨비시장’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없는 게 없다’는 의미를 담은 해학적 표현이었다. 1990년대부터 중앙아시아 등에서 보따리 장사꾼이 대거 밀려와 특수를 이뤘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포와 좌판 사이에 다툼도 잦았다.
구보는 지나온 국가의 역사가 시장 하나에 다 담겨 있음을 본다. 남대문시장에 설 때마다 북새통 속에서 억척스럽게 삶을 영위해 온 선조들의 몸부림을 떠올리며 고난의 세월을 견딘 그 의지에 절로 존경을 표하는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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