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골목 속으로
20. 잉카제국의 돌 장인들이 만든 신비로운 골목세상 쿠스코
해발고도 3400m 산소통 메고 찾는 여행자들
이끼도 접착제도 같은 모양 하나도 없는 12각 돌
천재 석공 잉카인들 솜씨에 놀라
만화 ‘태양소년 에스테반’ 황금 콘도르 없지만
가장 아름다운 도시·닭곰탕 판박이 칼도 수프 큰 선물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100년간 남미를 호령했던 잉카, 그리고 그 잉카의 수도인 쿠스코. 많은 사람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추픽추에 가기 위해 페루 쿠스코를 찾지만, 쿠스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다. 해발고도가 3400m에 이르고, 남미의 젖줄 안데스산맥의 중앙에 위치한 이곳은 한때 볼리비아·페루·칠레·에콰도르·아르헨티나 북부를 지배했던 남미 최대의 제국 잉카의 수도였다. 스페인의 침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지만, 잉카의 정신과 흔적은 여전히 선명하다. 관광객에게 하나라도 더 팔려는 호객행위에 눈살이 찌푸려지다가도 정교한 돌로 이뤄진 담벼락과 골목에 전의를 잃고 만다. 이런 골목을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특혜의 주인공이다. 세상 가장 특별한 산책은 쿠스코의 골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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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만에 다시 찾은 쿠스코
18년 만이다. 그때도 지금도 마추픽추에 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일행 중 한 명이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 병원 응급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겨우 퇴원할 수 있었다. 해발고도 3400m는 만만한 높이가 아니다. 북한의 백두산이 2744m, 제주도 한라산이 1950m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 대부분은 2000m를 밟아 본 적도 없다. 그러니 해발고도 3400m는 우리 몸엔 파격적인 도전이고 위기신호일 수밖에 없다. 쿠스코에 오기 위해 미니 산소통까지 들고 온 여행자도 눈에 띈다. 이런저런 약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오기도 한다. 한국인만 그럴 리 없다. 도대체 잉카문명이 뭐기에 사람들을 홀리는 걸까?
물가는 비싸고, 어딜 가나 호객행위에 치가 떨리는데도 나조차 이곳을 다시 찾게 된다. 친구들에게도 전한다. 쿠스코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설령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쿠스코만으로도 대단한 여행이라고. 지구 반대편 남미엔 볼 것도 할 것도 많지만, 쿠스코는 여행자에게 최고의 흥행카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 아르마스
‘가장 아름답다’는 표현을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지만, 써야 한다면 당연히 아르마스 광장에 그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 쿠스코는 고대 케추아어(잉카제국의 공용어)로 ‘배꼽’을 뜻한다. 고대 잉카인은 하늘은 콘도르,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쿠스코는 퓨마 형상으로 지어졌다. 잉카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한 남매에게 황금지팡이를 선물하는데, 그 지팡이를 던져 사라진 곳이 지금의 아르마스 광장이다. 쿠스코의 중심 중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페인의 침략으로 잉카의 건축물은 허물어지고, 유럽의 성당과 교회 건물로 대체됐다. 그래도 잉카의 모든 흔적을 없애는 건 불가능했나 보다. 페루의 건축자재들이 뿜어내는 잉카의 향기가 유럽도 잉카도 아닌, 아니 유럽이고 잉카인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광장에서 골목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돌의 세상이 시작된다. 바닥도 벽도 온통 돌이다. 그냥 돌이 아니라 정교하면서도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는 큼직한 돌들의 향연이다. 관광객은 그 가운데 하나의 돌에 몰려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12각 돌
유명한 돌로 순위를 매기면 12각 돌이 세계에서 압도적 1등일 것이다. 얼마나 정교한지 카드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그 오랜 세월 이끼도 끼지 않았다. 잉카인은 돌을 다루는 천재들이다. 돌과 돌 사이에 접착제를 쓰지 않아도 지진에 끄떡없는 건축물을 완성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쇠망치로 부수고 다듬지 않고도 완벽한 돌의 조합물을 만든 것이다. 대로변은 여행자에게 무언가를 팔기 위한 이들로 북적이지만,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평범한 이들의 가정집이다. 세계적 관광지답게 물가가 비싼 편인데, 평균적인 페루의 임금 노동자라면 여행자가 북적이는 식당은 사치스러운 딴 세상이다. 여행자에게 과하게 친절하지도, 부담스러운 눈빛을 발사하지도 않는다. 진짜 잉카인의 후예들은 쿠스코 산동네에 산다. ‘신과 가장 가까운 데는 가장 높은 곳’이라는 잉카인의 믿음이 전혀 근거 없는 게 아님을, 쿠스코의 산동네에서 깨닫는다.
우리네 닭곰탕과 비슷한 ‘칼도’
산페드로 시장은 쿠스코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다. 우리네 남대문이나 동대문시장 같은 곳이다. ‘칼도’는 페루식 수프다. 여행을 다니면 한식을 찾게 되는데, 페루에서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닭을 오랫동안 우린 국물은 우리네 삼계탕 혹은 닭곰탕과 판박이다. 산페드로 시장 작은 노점에서 18솔(약 6000원)을 내면 당근과 브로콜리가 듬뿍 올라간 국물이 나온다. 닭곰탕에 브로콜리를 넣고 끓인다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브로콜리와 당근에서 나오는 단맛이 거부감 없이 혀에 안착한다. 그냥 배만 부른 게 아니라 향수병에 지친 여행자를 구원하는 실로 고마운 한 끼였다.
어릴 적 만화영화를 보며 키운 꿈
어릴 적 ‘태양소년 에스테반’이라는 만화를 보면서 막연하게 남미를 꿈꿨다. 주인공이 황금을 찾아 떠나고 끝내 그 황금의 제국을 발견하는 줄거리로 기억한다. 황금색 콘도르를 타고 날아다니던 주인공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저 황금의 세상에 꼭 가 보고 말리라’고 마음먹었다. 그 황금의 세상이 내겐 페루였고 쿠스코였다.
이후로는 ‘꿈은 다 사치고 현실에 기반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지냈다. 그렇게 일로 방문한 쿠스코에서 열 살쯤의 내가 가졌던 생각을 되새겼다. 페루는 꼭 닿고 싶은 환상이었다. 만화 속 황금의 콘도르는 없지만, 그토록 가 보고 싶었던 곳에 와 있다.
꿈을 잃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나도 모르게 꿈을 이룬 셈이 됐다. 가진 건 늘 하찮게 생각하고, 가지지 못한 것만 열망한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이뤄진 것이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그 자각이 진짜 황금은 아닐까?
18년 만에 찾은 페루에서 나 자신을 조금은 칭찬해 주기로 했다. 나 자신을 혼내는 것도 나다. 남들보다 더 잘 살기를, 더 많은 걸 이루기만을 바라지만 나를 응원해 주는 게 우선이다. 2024년 쿠스코는 내게 가장 큰 선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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