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느낌 물씬 나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붕어빵 카트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해를 넘기기 전 처리해야 할 일을 더는 미룰 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건강검진 말이다.
병원에서는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몰리니 제발 미리미리 방문하라고 충고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나 보다. 주변을 봐도 여름에 정기검진을 끝냈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건강검진은 여유롭게 하면 조금 손해 보는 느낌이랄까? 시험 날짜에 임박해 하는 벼락치기 공부처럼 연말에 허겁지겁하는 건강검진만의 긴장감도 분명 매력 있다.
올해 건강검진도 11월 끝자락에 부랴부랴 다녀왔다. 오전 7시30분 예약이었음에도 대기실은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레 대기 시간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병원은 고층 빌딩에 자리해 전망이 꽤 근사해 답답하지 않게 기다릴 수 있었다. 이름이 호명되기만을 기다리며 무심코 창 너머를 바라봤는데, 그때 서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촘촘한 아파트숲 사이 불쑥 돋아 있는 사무실 건물들, 햇빛을 자잘하게 머금은 한강, 우뚝 솟은 남산타워를 지나 웅장하게 펼쳐진 북한산까지. 새삼스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서울이 원래 이렇게 예쁜 도시였던가?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넋 놓고 감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를 알차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일상이라는 이유로 그냥 지나쳤던 거리와 장소를 떠올려 봤는데, 생각나는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휴대전화 사진첩을 뒤적여 봐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사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여행 갔을 때 찍은 다른 나라의 거리 사진이 더 많았다. 서울에서는 교통체증에 짜증 낼 줄만 알았나 보다.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면 구석구석 특별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주변을 담을 생각은 안 했던 것이다.
서울은 원래 예쁜 도시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곳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이유로 주변의 아름다운 광경을 둘러볼 여유와 눈을 갖추지 못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니 한강에서 유람선도 못 타 봤고, 경복궁도 못 가 봤다. 가까우니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루다가 여태까지 아무 데도 못 가 본 것이다. 어쩌면 여행 온 외국인이 나보다 구석구석 더 잘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쯤 되면 서울에 ‘거주’할 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대기실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불현듯 일상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행자의 부지런함과 설렘으로 일상을 산다면 출퇴근 교통체증에도 좀 더 너그러워지고, 매일 걷던 길에서도 낭만을 찾을 수 있을 듯했다. 현지인처럼 여행하기도 유행하는 마당에 여행자처럼 일상을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날이 흐리면 흐린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감사하면서 가는 시간이 아까워 하나라도 더 눈에 담으려는 자세로 한 번 살아 보기로 했다.
검진은 예상 시간보다 2시간이나 더 걸렸다. 평소 같았으면 짜증 한가득 안고 택시를 타려고 서둘렀겠지만, 그날은 지하철 한 정거장을 천천히 걸어 보기로 했다.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의 신난 표정과 오래된 음식점 간판 등 평소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여행자처럼 일상 살아 보기,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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