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페르소나 - ‘조립식 가족’으로 새로운 가족·아빠상 보여준 최원영
담백한 국수 한 그릇 말 듯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엄마들에 버림받은 아이들 받아들인
부성·모성 다 가진 든든·따뜻한 인물
선악 넘나들며 넓혀간 연기 스펙트럼
판타지 같은 캐릭터 현실로 끌어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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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모가 자식을 키워 줘? 키우는 거지. 잘 먹고, 잘 자고, 재밌게 살고 그러라고 키우는 거지. 돈 내놓으라고 키우는 거야? 갚으라고 키우는 거냐고?” 드라마 ‘조립식 가족’에서 윤정재(최원영)는 강해준(배현성)에게 그렇게 말한다. 윤정재와 강해준. 벌써 성이 다르다. 그런데 이 윤정재는 자신이 강해준의 아빠라는 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윤정재는 우연히 선을 본 강서현(백은혜)의 아들 강해준을 집으로 데려왔다. 해준의 엄마는 서울로 돈 벌러 간다고 떠난 후 소식이 끊겼다. 이모 강이현(민지아) 집에 맡겨진 해준을 이 아빠가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어린 해준이 “감사합니다. 아저씨가 아빠하면 좋겠어요”라고 하자 정재는 아이를 받아들인다. “그래. 그럼 여기 있을 동안은 아빠 해.”
그렇게 윤정재의 아들로 10년간이나 살아왔지만 강해준에게는 이 아빠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게 있다. 자신을 아들로 키워준 것을 은혜로 생각하고 갚고 싶어한다. 친아빠가 나타나 미국 농구 유학을 떠났지만 발목을 다쳐 돌아온 강해준은 그간 패션모델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 8억 원이 든 통장을 윤정재에게 내민다. 하지만 기뻐할 줄 알았던 그는 불같이 화를 낸다. “누가 그래, 갚으라고? 너 아빠가 그런 거 하라고 미국 보냈어?”
이 아빠에게는 친딸인 윤주원(정채원)이 있지만 또 한 명의 아들도 있다. 이웃집 김대욱(최무성)의 아들 김산하(황인엽)다. 딸 윤주원이 어려서 ‘오빠, 오빠’ 하며 잘 따랐던 김산하는 그 나이에 엄마에게 버림받았다. 윤주원은 그것도 눈에 밟혔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같이 밥을 먹으며 지내다 보니 김대욱도, 김산하도 가족이 됐다. 김산하 역시 친아빠가 있지만 윤주원에게도 아빠라고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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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한 아빠 윤주원은 사실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런데 그 판타지를 현실감 있게 만들어낸 건 다름 아닌 배우 최원영이다. 역시 배우인 심이영과 결혼해 슬하에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이 아빠는 ‘조립식 가족’을 통해 부성애와 모성애가 결합된 판타지적 인물을 현실로 끄집어낸다. 칼국수집을 하는 이 인물은 그래서 요리로 그 마음을 표현한다. 정성껏 요리를 만들어내고 그걸 맛나게 먹는 가족들(성도 다르고 피도 다르지만)을 보며 흐뭇해한다. 세상 엄마들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동시에 자상한 아빠로서의 따뜻함도 보여준다. 성도 다른 아이들이 한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게다가 아빠 둘이 한집에 있는 걸 이상하게 바라보는 동네 시선에도 단호하게 맞선다. 김산하의 아빠 김대욱과는 오래된 친구처럼 저녁에 술 한잔 나누는 사이지만,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의견 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 모습은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도 보인다. 최원영은 이 부성애와 모성애를 모두 지닌 새로운 아빠상을 그려냈다. 만만찮은 연기 내공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원영은 2002년 영화 ‘색즉시공’으로 데뷔해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무수한 작품을 소화했다. 워낙 선한 외모를 갖고 있어 드라마 ‘선덕여왕’의 계백이나 ‘상속자들’의 윤재호 같은 평범한 훈남 역할이 많았지만 ‘매드독’에서 메인 빌런인 주현기 역할로 연기 변신에 성공하면서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후 ‘닥터 프리즈너’에서 악역 연기로 시청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도, ‘반짝이는 워터멜론’ 같은 작품에서 더할 나위 없는 훈훈한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면모를 보였으며, 그의 연기 폭이 계속 확장돼 왔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조립식 가족’으로 돌아온 최원영은 이 기막힌 가족의 서사가 근거를 갖게 해주는 작품의 중심적 역할을 해낸다. 엄마는 없고 아빠만 둘인데다 성도 다른 말 그대로의 ‘조립식’ 같은 가족을 진짜 가족처럼 만들어내는 끈끈한 정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이 작품이 특이한 건, 보통 우리네 드라마에서의 고정돼 온 성 역할이 뒤집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아빠가 아이를 버리고 떠가고 엄마가 남은 아이를 지키는 것이 드라마 속 고정된 성 역할이었다면 ‘조립식 가족’은 정반대다. 엄마들이 모두 아이를 버리고 떠나가고, 버려진 아이를 챙기는 건 이상한 아빠다. 이 드라마의 원작이 중국드라마 ‘이가인지명’이기 때문에 생긴 판타지다. 중국은 우리와 달리 아빠들이 가족 식사를 챙기는 일이 일상적이다. 그건 아빠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문화 자체가 달라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조립식 가족’이 새롭게 보여주는 이 아빠상은 현재 우리의 달라지고 있는 가족 형태 속에서 의미 있어 보인다. 가부장적 가족관과 그 속에 자리한 보수적인 아빠상은 이제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됐다. 자상하고 집안일도 함께 챙기는 새로운 아빠상이 요구되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혈연과 핏줄을 강조하던 옛 가족관이 일으키는 사회 문제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대안적 가족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내 핏줄만 소중하다 여기는 구시대적 가족관으로는 지금처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다 살 수 있는 공존의 시대를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윤정재라는 아빠의 존재는 ‘조립식 가족’이라는 새로운 가족이 조립될 수 있는 바탕이 돼 준다. 핏줄이 아니어도 함께 밥 먹고 지낸 그들을 가족으로 보듬고 그렇게 실제로 새로운 가족이 되게 만드는 인물. 가족보다 개인이 더 중요해진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빠여서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요즘 같은 가족 해체 시대에 대안적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그다.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연기를 해내며 스펙트럼을 넓혀 온 배우 최원영이 이 이상한 아빠 역할을 통해 우리 시대 페르소나로 떠오르는 건 그 인물이 지닌 대안적 성격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어 보이지만, 이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새로운 아빠상을 그는 기막힌 연기로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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