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이범석 다시 알기 - 국방장관직 사임과 6·25전쟁 발발
정적들 대북첩보국·호국군 창설 음해
국방부 장관 임명 8개월 만에 옷 벗어
퇴임식서도 국방 양과 질 중요성 강조
6월 26일 대통령 경무대로 철기 호출
북 속도 늦추려면 한강철교 폭파 필요
조야에선 장관직 재임명 목소리 커져
무초 주한미국대사 반대로 복귀 못해
7월 중화민국 대사 임명돼 대만행
철기 이범석의 국방부 장관 재임 기간 8개월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국방건설을 위해 이룬 업적은 대부분 지금까지도 국군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정책이었다. 국군의 이념과 사명을 정립해 국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상통일과 사상무장을 통해 공산주의자와 싸울 수 있는 정신적 자세를 마련했다. 그리고 국군 장교단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편중 문제를 해결해 국군의 정통성을 확립했다. 철기는 이외에도 국군의 확장, 장비 확보, 여군 창설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6·25전쟁 바로 1년여 전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철기는 그가 만든 국방조직 중 국방부 대북첩보국, 호국군과 같은 전쟁에 절대 필수적인 조직이 해체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전쟁을 맞이한다.
국방부 장관직 해임
철기는 1949년 3월 21일 퇴임식을 열고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철기가 국방부 장관으로서 정훈국과 대북첩보국, 호국군을 창설한 것 등이 정치적 영향력 확대라고 음해했던 정적들의 모략 결과였다. 하지만 오직 군인이었던 철기는 물러나는 마당에도 국방력 강화를 강조했다. 그는 퇴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군은 본래 질만 가지고는 안 되며, 양만 가지고도 안 되는 것이다. 양은 유형의 존재이며, 질은 무형의 존재로서 이것이 함께 종합돼야 한다. 제아무리 질이 우수하더라도 양이 극도로 부족하면 어려움을 능히 극복하지 못한다.
탱크 1대는 잘해야 탱크 3, 4대를 격파할 뿐 10대, 20대를 제압하지 못하며, 우수한 포 1문은 적의 포 3, 4문을 제압할 수 있어도 10, 20문을 제압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곧 적합한 양의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질의 우열에서도 꼭 같은 이치가 적용될 것이다. 질이 졸렬하면 아무리 넉넉한 양을 가져도 소용없다. 총을 쏠 줄 모르는 사람은 총을 쏠 줄 아는 사람에게 패하게 마련이다.”
6·25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했다. 국방부 장관직에 이어 국무총리직도 사임하고 반 연금 상태에 있던 철기는 북아현동 집에서 전쟁 소식을 들었다. 당일 철기는 집에 있으면서 찾아온 손님들로부터 군 병력이 전방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전쟁이 벌어졌다는 걸 알았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 아침, 철기는 대통령 비서인 황규면으로부터 경무대(대통령 거처)로 급히 와 달라는 연락을 받고 들어갔다. 이승만은 미안한 표정과 함께 다급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아무래도 지금 정세가 매우 긴급한 것 같네. 남의 일처럼 보지 말고 마음속 모든 감정을 잊어버리고, 오직 애국하는 마음으로 도와주게.”
철기는 이날 오전 10시 국방부에서 대통령 지시로 열린 국방부 장관 주재의 ‘긴급 현역과 원로 군 경력자 합동회의’에 이승만 대통령 요청으로 참석했다. 여기서 철기는 한수 이북은 포기하고 한강선에서 방어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김홍일 장군, 김석원 장군이 여기에 동조했다.
“38선을 연한 방어선이 붕괴된 현재 상황에서 시?공간적으로 전선을 수습할 방책은 한강선 방어밖에 없소이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서울 북방에서의 결전만을 주장하는 채병덕 참모총장을 설득하지 못했다. 작전 분야가 아닌 병기장교 출신 참모총장의 한계였다. 철기는 이날 심야와 다음 날(27일) 새벽 열린 비상국무회의에도 참석했다. 그는 각료가 아니었지만 여러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이 강력히 요구해 참석했다. 여기서 철기는 역시 강력하고도 분명한 전쟁지도 방침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서울을 사수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고 철수할 것인지를 당장 결정해야 합니다. 만약 철수한다면 작전상 적의 한강 이남 공격 속도를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한강철교를 반드시 폭파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철기는 아무 실권이 없는 야인일 뿐이었다. 비상국무회의는 수원 천도만 결정했다. 결국 서울이 무너진 후 ‘시흥지구방어사령부’가 급하게 편성됐다. 당시 참모학교장이던 김홍일 장군이 시흥지구 방어사령관이 돼 한강선을 그나마 3일간 지켜냈다. 이로 인해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될 수 있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조야에서 나오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 교체와 철기의 복귀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6월 28일 충남도청에서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전규홍 총무처 장관은 정식으로 신성모 장관을 경질하고, 철기를 국방부 장관으로 재임명할 것을 제의했다. 6월 29일에도 이승만을 찾아온 국회의장 신익희와 부의장 장택상이 국방부 장관을 철기로 바꿀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는 이승만도 동의의 뜻을 내비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주한미국대사와 상의했다. 그런데 국내 인사들과 반대로 무초 대사는 철기의 민족주의적 성향 관계로 그를 극구 반대했다. 무초 대사는 영어에 능통하고 고분고분한 선장 출신인 신성모가 그대로 유임하기를 바랐다. 이승만은 무초 대사의 뜻을 받아들이고, 대신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을 경질했다.
그날 밤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 앞에서 푸념했다.
“우리는 지금 철기와 같은 파이터가 급하게 필요한데 사사건건 무초 펠로가 저 모양이란 말이야.”
미국 지원이 절실했던 한국이었다. 대신 이승만은 철기에게 호남지역으로 들어가 적 후방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칠 것을 주문했다. 나라가 공산당에게 먹히기 일보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기에 촌부라도 할 일이 있다면 발 벗고 나서야 했다. 그러다가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은 철기를 중화민국(오늘날 대만) 대사로 임명했다. 철기가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와 친분이 있으니 도움을 청하라는 의도였다.
국군이 여지없이 밀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조국이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는 어려운 시기에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국군을 뒤로하고 철기는 묵묵히 자유중국대사로 출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유창한 중국어와 항일투쟁 시 인맥을 총동원했다. 당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중화민국이 안보리와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있도록 그 역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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