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군사편찬연구소 공동기획 - '군인다운 군인' 군인기본자세 캠페인
⑦ 군인기본자세의 역사적 기원 : 부동자세·기본동작
부동자세·방향 전환·행진요령 등
오늘날 군인기본자세 내용과 비슷
전투행위 핵심이란 사실 파악한 듯
미군 1778년 프로이센 장교 초빙
부동자세·기본동작 기초교육 시작
‘미합중국 부대 명령 및 규율’ 발간
워싱턴 초대 대통령 필독서 지정
전투력 향상에 큰 영향 미쳐
부동자세와 기본동작은 군인의 기본이다. 강군일수록 장병들에게 올바른 군인기본자세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군대는 언제부터, 왜 올바른 군인기본자세를 장병들에게 강조하고 교육했는지 알아본다.
만국 공통의 군인기본자세
군대의 양성기관에 입소한 이들에게 가르치는 전투행동의 핵심은 ‘기동(Maneuver)’과 ‘사격(Marksmanship)’이다. 기동과 사격은 군대 교육훈련의 출발점이며 전투 준비의 핵심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동이나 사격을 가르칠 순 없다. 전투행동을 몸으로 구현할 수 있는 토대가 없기 때문이다. 군대에 갓 들어온 신병은 부동자세와 기본동작 같은 기본자세(제식)부터 배운다. 실사격 전에 배우는 정조준, 호흡 조절, 사격자세, 격발요령 등도 부동자세와 기본동작의 응용이다. 올바른 기본자세를 익혀 높은 수준의 전투력을 유지하는 것은 장병 공통이며 동시에 만국 공통이다. 그렇기에 이를 ‘군인기본자세’라고 부르는 것이다. 군대는 언제부터 부동자세와 기본동작 등을 교육훈련 과목의 일부로 장병들에게 교육했을까.
군인기본자세 교육훈련의 역사적 사례
미국 독립전쟁(1775~1783) 당시 미군의 전투력은 모든 면에서 영국군에 열세했다. 특히 미국의 주력이었던 독립혁명군은 민병대 수준이었다. 경험이라고는 인디언과 싸운 게 전부였다. 그래서 미군은 1778년 프로이센의 장교인 프리드리히 폰 슈토이벤을 초빙했다.
슈토이벤은 부동자세와 기본동작을 포함한 기초교육을 했다. 규정·교범을 만들었으며, 120명의 시범중대를 선발해 부동자세와 기본동작을 가르쳤다. 장병들은 명령과 복종, 경계와 신속, 집중과 단결 등이 무엇인지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군인기본자세를 배움으로써 비로소 ‘군대가 어떤 곳이며, 군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독립전쟁 시기, 미군의 변화·발전은 여기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미 육군소장으로 진급한 슈토이벤 장군은 1779년 『미합중국 부대 명령 및 규율(Regulations for the Order and Discipline of the Troops of the United States)』을 집필·발간했다. 미 육군의 첫 번째 야전교범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규정집은 총 164쪽 분량의 ‘푸른 책(Blue Book)’으로 불렸다. 군대 예절, 규정과 방침, 간단한 군법, 용모와 위생, 계급별 의무와 책임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미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이자 후일 미국 초대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 장군은 규정집을 장교 필독서로 지정했다.
여기에는 부동자세·기본동작의 설명 및 교육훈련 방법 외에도 군인다운 외모, 절도 있는 행동, 바른 예절 등의 기술이 포함됐다. 군인기본자세를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반복훈련은 18세기 후반 미군 전투력 향상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군대를 앞세워 아시아로 밀려 들어오던 혼란기에 조선은 주변국인 러시아, 중국, 일본에 비해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조선은 위태로운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해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 청나라에 각각 수신사, 영선사를 파견해 신식 무기와 장비를 확보하고 외국에서 군사전문가를 초빙해 근대식 군대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에 1881년 창설된 군대가 ‘교련병대(敎鍊兵隊·별칭 별기군)’였다. 조선은 일본 공병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를 교관으로 초빙했다. 그러나 호리모토는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받지 못한 자였고, 전투 경험도 없었다. 그는 1880년경 일본의 육군호산학교를 수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880년 이전까지 육군호산학교는 교육훈련체계를 제대로 안착시키지 못했다.
교련병대는 기초에 충실한 교육훈련을 받지 못했고, 단기간에 성과를 내보이는 데 집중하다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해체됐다. 이후에도 근대식 군대를 양성하려는 조선의 노력은 계속됐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88년 미군 대령 윌리엄 다이 등 4명을 군사고문관으로 맞이하면서 군사교육기관인 연무공원을 창설했으나 내부적 문제로 인해 큰 소득 없이 1894년 사실상 해체됐다.
조선은 포기하지 않고 1896년 무관학교를 창설하고 초급무관 양성에 힘썼다. 그런데 참고할 군사교범이 마땅치 않았다. 교관들이 프랑스,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외국 서적을 참고해 구두로 학도들을 교육했으나 한계가 뚜렷했다.
이에 1896년 드리트리 푸차타 대령 등 러시아 군사교관단 등을 초빙해 친위대·시위대 등을 교육했으나 역시 진전이 없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됐을 때 무관들은 조선 군대 고유의 ‘기준’과 ‘기초’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준과 기초가 없으니 편제와 명칭을 달리한 부대들이 창설됐다가 사라지고, 해외에서 교관들이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부대가 통째로 흔들렸던 것이다.
이에 기준을 마련하고자 1898년 무관학교 교관단이 『보병조전』을 간행했다. 『보병조전』의 ‘기본교련’ 편 ‘도수교련’을 보면 부동자세, 방향 전환, 행진요령이 포함돼 있다. 오늘날 군인기본자세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병조전』의 ‘총칙’ 편은 ‘교련의 주요한 의도는 지휘관 및 병졸을 훈련해 전쟁에 이용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제반 연습을 전쟁에 접합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부동자세·기본동작 등이 전투행위의 핵심이란 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대한제국의 5개 보병대대, 1개 기병대대, 1개 포병중대는 1907년 해체 직전까지 『보병조전』으로 기본교련과 전투훈련을 했다.
보편성을 지닌 국군의 군인기본자세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군인기본자세는 국가를 막론하고 창군기부터 오늘날까지 군대가 강조하는 기본이며 기초다. 경쟁 승리를 추구하는 집단은 공통적으로 부동자세·기본동작을 중요시한다.
항시 부동자세를 점검하고, 기본동작을 반복·숙달하는 것은 교전과 전투의 프로페셔널인 군인의 당연한 일과다. 강군일수록 교육훈련의 기본과 기초를 강조하며, 장병들에게 올바른 군인기본자세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잘 싸우는 군인, 싸워 이기는 부대를 만드는 증명된 방식이다.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디자인: 국방출판지원단
‘군인다운 군인’ 군인기본자세 캠페인은 국방일보 창간 60주년을 맞아 ‘군, 기(紀) 세우기’ 일환으로 군사편찬연구소, 국방부 병영정책과와 함께 진행합니다. 본 캠페인은 각 부대의 군인기본자세 이해 목적으로 제작됐습니다.
감수
박동휘 육군3사관학교 교수
김영환 육군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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