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생도 ‘위국헌신’ 92고지 보훈부 현충시설 지정
졸업 앞둔 1기·기초군사훈련 하던 2기 539명
6·25전쟁 발발하자 군번도 계급도 없이 참전
92고지 등 교내외서 분전…193명 전사·실종
선배들이 지킨 전투전적지 국가 공인 큰 의미
40여 문화재·현충시설·기념물 체계적 관리로
역사·문화·안보·생태 환경 국민에 알릴 기회
6·25전쟁 발발 직후 육군사관학교(육사) 생도들이 적에 맞서 싸웠던 서울 노원구 92고지 일대가 국가보훈부(보훈부)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군번·계급도 없이 조국을 구하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나섰던 육사 생도들의 위국헌신이 조명받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온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요충지였고 다수의 문화재·현충시설이 자리한 육사 부지의 역사적 중요성도 부각되고 있다. 최한영 기자/사진 제공=왕현우 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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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는 지난 22일 “6·25전쟁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부터 참전한 육사 생도 1·2기가 27~28일 전투를 수행했고, 대다수가 후퇴한 후에도 인근 불암산에서 유격대 활동을 전개한 생도들이 3차 전투에서 적 50여 명을 사살한 육사 내 92고지가 지난 12일 보훈부 현충시설(관리번호 11-2-19·국가수호 유형)로 지정됐다”고 밝혔다. 92고지는 육사 생도대 광장 뒤에 있는 해발고도 92m의 고지를 말한다.
보훈부는 국가유공자 또는 이들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건축물·조형물·사적지, 또는 기준에 부합하는 일정 장소를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있다. 보훈부는 육사 생도 1·2기가 6·25전쟁 초기 군번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격전을 치른 92고지의 상징성을 인정하며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보훈부에 92고지 현충시설 지정을 요청한 주노종 한국정부조달연구원장은 “92고지는 청운의 꿈을 품고 육사에 입교한 생도 1·2기가 교내에서 열악한 개인화기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역사적인 현장”이라며 “생도들의 호국정신을 후대에 기리기 위해 영구히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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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생도 1·2기, 92고지 일대서 적에 맞서 분전
심호섭(중령) 육사 군사사학과장에 따르면 1949년 7월 15일 입교해 졸업·임관을 1주일 앞둔 생도 1기 262명, 첫 4년제 육사 생도로 1950년 6월 1일 입교해 기초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생도 2기 277명은 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전투대대를 편성했다. 생도 1·2기는 25일 저녁 경기도 포천군 내촌리 377고지로 이동해 진지를 구축하고 2시간여에 걸쳐 첫 교전을 벌였다. 26일 저녁 7시, 상부 명령에 따라 육사로 철수한 생도들은 교내 92고지 일대에 다시 방어진지를 만들었다. 적 주력이 서울 외곽 창동방어선을 돌파한 직후인 27일 오후 10시경 육사 전 지역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적 선두부대는 생도들이 지키고 있던 92고지 일대를 집중 공격했다. 전투는 28일 새벽까지 이어졌고, 생도들은 적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오전 10시 철수해야 했다.
대다수는 후방으로 이동했지만 13명의 생도(1기 10명, 2기 3명)는 육사 인근 불암산으로 이동해 후방 교란작전을 수행했다. 국군7사단 9연대 소속 병사 7명이 합류해 20명으로 구성된 ‘불암산유격대’는 총 4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적 후방을 교란하고 납북인사를 구출했다. 8월 15일 3차 전투에서는 적의 의용군훈련소로 쓰이고 있던 육사 일대(92고지 포함)를 습격해 50여 명을 사살하는 성과도 거뒀다. 안타깝게도 3차 전투에서 유격대를 이끌던 김동원 생도 등 6명이 전사했다. 유격대에 속했던 생도·병사들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원 전사했다. 육사에 따르면 이들을 포함해 6·25전쟁 초기에만 전체 539명의 1·2기 생도 중 193명이 전사·실종됐다. 교내에는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불멸탑과 참전생도상이 세워졌다.
특히 생도 2기는 육사 역사에서 ‘비운의 기수’로 불린다. 생도 1기는 1950년 7월 10일 충남도청 광장에서 열린 임관식에서 육사 10기로 공식 임관했다. 그러나 생도 2기는 그해 8월 15일 부산에 창설된 육군종합학교 1·2기생으로 편입, 6주 교육을 마치고 임관하며 한동안 육사 동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은 1996년에야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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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시설 지정 계기 역사관 건립 등 고려
육사는 보훈부의 이번 92고지 현충시설 지정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선배 생도들의 헌신을 엿볼 수 있는 교내 전투전적지가 국가기관 공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태산(중령) 군사사학과 교수는 “생도 1·2기 선배들이 70여 년 전 전투에 임했던 마음가짐을 확인하고 선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92고지”라며 “재학 중인 생도들에게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 2021년 12월에는 92고지 전투 당시 적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련제 기관총 1정이 발견되기도 했다.
육사는 92고지가 현충시설로 지정됐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하고, 생도 1·2기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한 역사관이나 기념관 건립도 고려하고 있다. 현재는 92고지 정상에 육사 20기 생도들이 졸업 기념으로 1964년 2월 건립한 신조탑이 서 있다.
육사 내 기존 40여 문화재·현충시설·기념물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노력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육사는 △육사 18기가 1962년 건립한 국기게양대 △박정희 대통령 하사금으로 제작한 범무천 쌍사자상 △육사 19기 졸업을 기념해 1963년 완성한 승화대 △육사 21~24기 졸업 기념으로 1965년 건립한 통일상 △화랑의식을 포함해 육사 중요 행사가 열리는 화랑연병장과 사열대를 서울시 근현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할 준비를 하고 있다.
92고지 일대, 삼국시대부터 군사요충지
이 같은 움직임은 육사 일대가 지닌 ‘역사·문화·안보·생태’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상훈 군사사학과 교수는 “92고지를 포함한 육사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군사요충지였다”며 “임진왜란 때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물리쳤으며, 정묘효란 때는 조선 기병이 주둔했다”고 전했다. 조선시대 국방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삼군부(三軍府) 중 하나인 청헌당도 1967년 원래 자리에 정부서울청사가 건립되며 육사로 이전했다.
광복 1년 후인 1946년에는 국군의 모체가 된 국방경비대와 국방경비사관학교가 현 육사 부지에서 창설됐다. 육사도 6·25전쟁 여파로 1951년 10월부터 1954년 6월까지 경남 진해시(현 창원시)에서 운영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현 위치를 지켜왔다. 육사 일대가 우리 군의 역사 자체인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대한민국 건축 명장’으로 꼽히는 김수근·김종성·김중업·이광로 작가 등의 건축물이 유일하게 모여 있는 곳이 육사다. 이들이 각각 설계한 교훈탑, 학술정보원(육사도서관), 육군박물관, 학교본부는 건축학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근대건축물로 꼽힌다.
생태적으로도 육사 일대는 서울시에서 생태 환경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으로 꼽힌다. 교내 범무천 일대에 대표적 습지나무이자 서울 시내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오리나무가 자생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육사는 “군 교육기관이라는 특성 때문에 부지의 역사적 중요성과 가치가 드러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이번 92고지 현충시설 지정을 계기로 육사 일대의 ‘역사·문화·안보·생태’ 환경이 많은 국민에게 알려지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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